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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은 울산의 오래된 도시다. 울산읍성을 중심으로 한 울산 구시가지가 울산의 중심이라면 언양은 울산의 초입을 지키는 울산의 상징이었다. 선비의 땅인 언양은 예로부터 인물이 많았고 물산도 풍부했다.
 바로 그 곳에 울산을 대표하는 언양향교가 남아 있다.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 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언양향교를 처음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반월산 아래에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 옮겨 지은 것으로 보인다.
 낮은 언덕을 등지고 평지에 지었으며 교육공간을 앞쪽에, 제사공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지 않고 명륜당 축과 대성전 축이 꺾여져 있다. 이는 향교를 옮겨 지을 때 대성전을 먼저 지어서 뒤에 지은 명륜당과 축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으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그리고 내삼문·외삼문 등이 있다.
 

 언양향교는 조선시대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됐다. 1696년(숙종 22)에 도유사 김정하(金精河)가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1700년에 명륜당과 동재(東齋)·서재(西齋)를 중건하였다. 1859년에 중수하고 1870년에 재임(齋任) 곽중린(郭仲麟)과 유생의 노력으로 중수하였다. 1985년에 대성전과 내삼문(內三門)을 보수하였고, 1986년에 명륜당과 동재 등을 중수하였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받아 운영하였지만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고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향교의 입구 양쪽에 조선시대에 세운 선정비들을 볼 수 있다.
 

 관리는 잘 되어 있는 편이나 표지판이 없고, 가끔씩 단체(유치원, 초등생, 시티투어)관람을 하고 있다.
 동재와 서재 크기가 달랐으나 서재가 오래되어 기울어 동재와 같은 크기로 신축했고 동재는 보수공사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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