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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처용무는 울산의 처용암과 처용설화가 바탕이 된 춤이다. 이 춤은 지난 2009년 9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울산신문 자료사진

지난 1971년 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처용무는 울산의 처용암과 처용설화가 바탕이 된 춤이다.
 이 춤은 지난 2009년 9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처용무는 통일 신라 헌강왕 때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아, 최소 1,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통일 신라 때는 궁궐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새해를 맞아 평화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진행됐다.
 

 고려 시대에도 처용무는 커다란 변화 없이 이어져 내려왔고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형식에 변화를 맞았다. 세종대왕은 처용무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규모도 확대시켰다. 혼자서 추던 춤을 다섯 명이 함께 추도록 했고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던 음악도 정리했다.
 

 일반적으로 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여성이지만 처용무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남성들만 춤을 춘다.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까지는 혼자서 춤을 췄지만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다섯 명이 함께 춤을 추는 형태로 바뀌었다.
 

 일부 학자들은 다섯이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시점을 영조 때로 주장하지만 일반적으로 세종 때로 보고 있다. 다섯 사람이 펼치는 처용무는 통일성이 중시되었던 춤이다.
 처용무를 추는 춤꾼들은 다섯 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었다. 청색은 동쪽, 흰색은 서쪽, 붉은색은 남쪽, 검은색은 북쪽, 노란색은 중앙을 상징하고 있다.
 

 처용무를 추는 춤꾼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쓴다. 바로 처용을 상징하는 가면이다. 가면을 쓰는 것은 바로 처용의 높은 인격에 감탄한 역신(귀신)이 처용의 얼굴만 보아도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설화에서 비롯된다. 역신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반 가정에서도 처용 그림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처용무와 함께 온 음악처용무에 사용되었던 음악도 춤과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성종 때 쓰여진 조선 최고의 음악 서적인 《악학궤범》에는 봉황음을 비롯하여 처용무에 사용되었던 여러 음악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다양한 음악들이 처용무에 사용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처용무는 1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통과 맥을 이어 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수준 높은 예술과 고유한 풍습을 중시했는지 잘 보여 주는 전통문화다. 그 뿌리가 바로 울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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