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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목민심서'를 읽었던 적이 있다. 잘 알다시피 이 책은 1821년에 다산 정약용이 쓴 것으로 수령이 갖추어야 할 직분에 대해 적은 것이다. 다산 스스로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천할 수 없어서 '심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이 책은, 19세기 초 조선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목민심에서는 당시의 사회적 모순과 무지몽매한 '백성을 부양'(牧民)하는 조선시대 학자적 관료가 이를 해결할 사회개혁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이 책의 많은 내용 가운데 두어가지 기억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산에서 솔 싹을 뽑고 있는 스님이야기와 전라도 남쪽 해안지방의 귤과 유자 이야기이다. 내용은, 스님은 소나무 숲을 관리하지 못한 죄로 범같은 관리의 매질과 돈 바치는 일을 면하려고 미리 소나무 싹을 뽑아버린다는 내용이다. 귤과 유자의 경우도 저졸이 미리 찾아와서 과일 개수를 세고, 나무둥치에 표시를 해둔 다음 과일이 익으면 다시 찾아와서 바람에 몇 개 떨어진 것이 있으면 추궁해서 보충하게 하고, 아니면 그 값을 징수하며, 광주리째 가져가면서 돈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저졸 대접하는 비용이 들고, 관리의 출입에 따라 이런저런 피해를 본 이웃이 이 집을 나무라고 들어간 비용을 받아낸다는 것이다. 결국, 유자나무 주인은 나무에 구멍을 뚫어 호초를 넣는 등의 방법으로 나무를 죽게 하여 관리대장에서 빠지게 한 후라야 피해를 당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관리의 힘이 극에 달했던 조선시대 백성의 고단한 삶을 먼저 느끼게 된다. 나아가서 관리의 이런 횡포는 결국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게 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극단적으로 말하면 백성들이 관리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똑 같은 관리로 출세하거나 아예 아무것도 빼앗길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해 지는 두 가지 길뿐이었다는 말이다. 다산 역시도 "이런 일이 그치지 않으면 나라의 귤과 유자가 없어질 것이며, 심는 일만 신칙하고 다른 간섭을 말며, 익은 후에 값을 후하게 쳐주고 그 빼앗아 가는 것을 금하면 번식할 것이다"라고 해결책을 적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무지막지한 횡포도 법치국가 조선에서는 모두 법에 근거한 행위였다. 즉, '경국대전' 공전 식재(植栽)조에는 "금산의 벌목과 방화를 금하고, 묘목을 심거나 씨를 뿌려서 키우는데 연말에는 그 수를 보고하고, 위반 시 산지기는 장 80이고, 담당관은 장 60에 처한다"는 규정과,  "제주 등 세 고을에서는 감, 귤, 유자나무를 매년 비자나무, 옻나무, 산유자나무에 접붙이고 근방에 사는 사람을 지정해서 간수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목민심서'의 이런 내용을 보면서 오늘날의 각종 국가기관이나 지방관청이 떠오르는 것은 비단 필자 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유사한 일은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관청의 비 협조로 공장건설이 어렵다는 민원부터, 기존 기업체의 역외 이전으로 인한 산업공동화 우려까지 지역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시민의 불만과 불안은 결코 적지 않다. 더 나쁜 경우는 일부 비리 공직자들의 사익 채우기일 것이다. 이들의 횡포에 대책없이 당하는 시민이 아직도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이다. 공직자의 전문성과 청렴성의 정도는 사회발전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이 지적한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던 조선이 '목민심서'가 나온 불과 90년 뒤에 나라를 잃었던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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