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울산을 나타내는 동물로는 단연코 '고래'와 '용'과 '학'이 꼽힌다. 용과 학은 7,000년 전 반구대 암각화에서 유래된 고래보다는 역사에서는 뒤지지만, 서로가 신·구체제라는 시대정신의 표상으로서 충돌하면서까지 울산의 공동체 형성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울산에서 용과 학의 활용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울산에서 용은 태화사의 용을 먼저 들 수가 있겠다. 태화사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자장율사가 중국 태화못에서 만난 신인(神人)의 말을 좇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통도사보다 먼저 지금의 중구 태화동 황모산 아래에 지은 큰 절이었다. 지금 한창 공사중인 태화루도 애초 이 태화사에 있었다.

 다음으로는 동구 일산동의 문무왕비의 능이라는 댕바위 전설의 용과 처용설화에 나오는 동해 용의 아들 처용이 있다. 신라 왕실의 번영과 수호 의지를 나타낸 호국용이었다. 당연히 왕실과 귀족세력 등 상층부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골몰했다. 시대정신을 좇아 새로운 사회체제를 구축했다면 별 탈이 없었지만,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서 국가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멸망할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지방에서 수많은 호족이 등장하여 독자세력화했다. 농민층의 반란이 연이어 터졌다. 미륵사상과 풍수사상 등 신흥사상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런 때에 헌강왕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대로 즉위 5년(879년)에 동해안 지역을 돌아보면서 개운포에 들렀다. 

 단순히 유람온 게 아니라, 동요하는 민심을 어루만지고 신흥세력을 무마하기 위한 순행이었다. '처용랑 망해사' 조의 끝 부분을 보면 능히 알 수 있다. "--지신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라면서 즐거움에 더욱 빠졌기 때문에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다" 

 '처용랑 망해사'조 맨 앞의 "서울로부터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담장이 맞닿았는데,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며--"라며 헌강왕대에도 번성했다고 보는 것은 착각인 셈이다. 헌강왕은 요충지이자 왕도에 가까운 울산에 들러야 했고, 그리고 호국용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처용설화의 탄생이다.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려면 민중에게 신화적인 믿음을 주는 게 가장 손 쉬운 방법이다. 특정 장소에 깃든 영웅의 탄생설화나 건국신화가 그렇다. 처용설화도 마찬가지다. 그 점에서 울산에서 용의 대척점에 있는 학을 살펴보자. 헌강왕 사후 10년 뒤 효공왕 5년(901년)에 계변천신 설화가 탄생했다. 당시 울산의 최고 실력자 박윤웅과 관련된 이야기다. 

 여성회관과 MBC 등이 있는 "계변성(戒邊城) 신두산(神頭山)에 학 두 마리가 금으로 된 신상(神像)을 물고 날아 와 울었다." 그래서 계변성은 신학성(神鶴城)이라고 했다. 울산의 실력자 박윤웅은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히기 위해 신라 왕실을 상징하는 용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으로 민중에게 매력적이고 친근한 학을 이용한 울산의 창읍설화, 즉 계변천신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박윤웅은 신라 말 당시의 달천 철소의 쇠와 삼산 염소의 소금, 그리고 반구동의 신라의 국제무역항을 이용한 해상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점차 쌓아 힘을 길렀다. 다른 호족을 차례로 무릎 꿇리고 울산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됐다. 신라 멸망 5년 전 930년에 부하 최환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보내 복속을 서약했다. 고려로서는 신라 왕도를 견제하는 핵심 기지를 확보했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뒤, 박윤웅의 공로를 높이 받들어 울산의 5개 군·현을 통합하여 흥려부라 하고 박윤웅이 다스리게 했다. 또 흥려백에 봉했으며, 채지로 농소 일대와 강동의 미역바위 12구도 주었다. 울산박씨, 즉 흥려박씨의 시조인 박윤웅은 죽은 뒤에는 울산의 수호신 계변천신으로 신격화돼 성황사에 모셔졌다. 

 이처럼 울산에서 용과 학은 나말여초기에 기존 세력과 신흥 세력(사상)의 상징물로서 역할을 맡았다고 하겠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에 맞서려면 당연히 그에 못지 않는 새로운 상징 동물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문화권에서 복록과 수명을 관장하면서 민중에게 매력적이고 친근하면서도 주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학을 십분 활용했을 것이다. 울산 역사의 맥락에서 또 다른 용과 학의 활용도를 다각도로 살펴봤으면 한다. 그래야 울산의 이야기가 보다 풍성해지리라.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