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달 말 50년 전 대통령 아버지가 찾은 독일을 대통령 딸이 찾아 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50년 전 우리는 얼마나 헐벗고 굶주렸던가. 얼마나 굶주렸으면 보릿고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까. 지금 그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실감하는 이들이 몇이나 되랴. 다 꿈 같은 이야기다. 그 시절의 절망을 넘어 국부(國富)를 이룬 사실을 기록한 책이 나와 우리를 울리게 한다.

 그 책은 '조국 근대화의 언덕에서'다. 여든 다섯 나이의 저자 백영훈씨가 경제개발 과정의 숨은 이야기를 적었다. 그가 현장에서 핵심 임무를 수행했기에 가능한 기록물이다. 책을 보면서 때로는 가슴이 터질 듯 아팠고, 어느 순간에는 마음이 뭉클했고, 온몸이 감전된 듯 전율했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이들의 고초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50년 전 공단건설이라는 혜택을 입어 전국 제일의 부자도시가 된 울산으로서는 꼭 봐야 할 책이다. 당시 정부는 굶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 지상 과제였다. 경제개발을 해야 했지만, 돈도 기술도 자원도 아무 것도 없었다. 돈을 꾸어 오는 일이 화급했다. 미국에 기대할 수도 없었고, 쉽사리 돈을 꾸어줄 나라도 없었다. 미국은 당시 군사정부에 부정적이어서 그동안의 원조마저 끊었다.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서독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한국이 공산 국가에 넘어가지 않게 반드시 경제개발을 이뤄야 한다는 점을 똑같이 분단국인 서독 정부에 호소하여 상업차관을 얻기로 한 것이었다. 경제사절단에 독일어 통역에 능통한 경제전문가가 있어야 했고, 급히 찾아낸 사람이 서독 유학생 1호로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백영훈씨였다.

 사절단은 1962년 10월 20일 서독 남부도시 뮌헨에 도착한다. 먼저 지멘스와 크룹, 폴리시우즈 등 유명 기업을 차례로 방문하여 사장단과 토론을 가졌다. 이는 기업의 우호적인 반응을 얻어야 서독 정부와 협상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들 기업에 정부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에르하르트 경제성 장관을 만나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우리의 초라한 국력으로는 사전에 약속할 형편도 못 됐다. 서독에서 무턱대고 부딪쳤다.

 에르하르트 장관이 뉘른베르크 대학 출신인 것을 안 백씨가 은사 포크트 교수에게 매달렸다. 그런 일에는 나설 수 없다고 했다. 급기야 부인에게 호소했고, 결국 포크트 교수가 나서 만남이 성사됐다. 15분도 되지 않은 면담 내내 에르하르트 장관은 냉담했다. 곧 급반전이 이뤄졌다. 서독 경제성에서 연락이 와 협상을 갖기에 이른다. 서독 정부에 제시한 차관액은 1억5,000만 마르크. 당시 우리의 경제규모로는 엄청난 액수였다.

 1962년 10월 27일은 한국 현대사에 영원히 기록돼야 할 날이다. 서독 정부와 경제 협력이 체결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서독 현지에 남은 실무진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일이 생겼다. 차관액 중에 절반인 민간차관을 받으려면 금융기관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는 당시 세계의 어느 은행에서도 지급보증을 받을 능력이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성사된 차관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우리 정부는 다급하고도 필사적이었다. 서독에 남은 실무진에게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지시가 잇따라 내려왔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구세주가 나타났다. 백씨의 서독 인맥. 서독 정부의 중견 공직자인 유학시절 함께 공부한 서독 친구들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너희 나라에서 서독에서 일할 광부와 간호 인력을 보내면,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서독 은행에서 지급보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서독 은행의 지급보증을 받았다. 이후 2억마르크에 달하는 차관을 더 받았다. 그 돈이 울산공단 건설에도 쓰였음은 불문가지다.    

 서독 차관이 성사된 날로부터 이태 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국빈 방문한다. 방문에 얽힌 이야기는 그동안 언론보도를 통해 너무나 많이 알려졌지만, 이 책에는 숨은 이야기도 한, 둘이 아니다. 이 책은 지난 개발연대의 이야기만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전체 11부 중에 4부에 걸쳐 새로운 시대의 국가전략도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향하게 하는 큰 미덕을 갖춘 값진 책이라고 하겠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