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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경주는 10년 시차를 두고 똑같이 대규모 개발로 도시 형태가 확 바뀌었다. 당시의 중앙정부가 두 지역의 강점을 살려 국가경제의 버팀목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울산은 1960년대 초에 공단으로, 경주는 70년대 초에 문화관광도시로 만들어 나라 살림을 살찌우려 했다. 경주가 그나마 여건이 나았다. 신라 고도로 풍부한 역사유적을 갖추고 있었다.

 국가 주도로 두 지역은 빠르게 개발이 진행됐다. 울산에 대규모 개발을 알리는 기공식이 열린 것은 1962년 2월 3일. 그 해 1월 7일 정부 조사단이 울산에 와 1주일간 공단 적정성을 다방면으로 조사한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기공식을 가졌다. 그만큼 자연조건이 좋은데다, 일제강점기 말에 만들어진 개발계획을 활용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초스피드 진행이었다. 

 경주는 어땠을까. 공업화의 발걸음을 뗀 1971년 6월 대통령이 포항제철에 들렀다가 일정에도 없는 경주방문을 했다. 당시 경주는 허물어져 가는 탑과 방치된 불상,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고분군이 산재한 초라한 시골도시에 불과했다. 문화재의 과학적인 발굴과 현대적인 개념을 도입한 안락한 관광휴양도시의 건설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인구 9만의 경주의 힘으로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빼어난 다양한 유적을 가졌지만, 제대로 다듬지 않은 탓에 관광객의 감소로 도시는 활력을 잃어갔다. 외국인 관광객이라야 한해 2만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관광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웅대·찬란·정교·유현한 문화관광도시를 만들기 위한 목표 아래 청와대에 관광개발계획단이 만들어졌다. 

 1971년 8월 13일 경주관광종합개발사업이 확정됐다. 72년부터 81년까지 10년간 사업을 펼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1단계로 72년부터 76년까지 기반시설 조성과 사적지구를 정비하고, 2단계로 77년 이후 문화관광도시로 꾸미기로 했다. 울산공단 건설 때처럼 사업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 모자라는 자금은 세계은행에서 빌리기로 했다. 

 그로써 경주도 그때 현재와 같은 모습이 짜여졌다. 울산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혜택을 오롯이 누렸다. 울산의 공단건설에 특별기구 울산특별건설국이 만들어져 울산 현지에서 진두지휘를 한 것처럼 경주 역시 특별기구가 생겼다. 72년 1월 5일 건설부 경주개발건설사무소가 설치돼 경주 현지에서 업무를 맡았다. 73년 3월에는 문공부의 사적관리사무소가 생기는 등 중앙부처의 현지 기구가 만들어져 개발이 본격화됐다. 

 사적지를 13개 지구로 나눠 진행됐다. 불국사 보수와 황룡사지가 발굴됐다. 73년 천마총·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대릉원을 갖췄다. 75년 안압지를 발굴하여 3만여점의 유물을 수습한 뒤, 일부 복원도 했다. 75년 경주박물관이 완공·개관됐다. 도심에 드넓은 고분공원이 만들어져 관광객이 여유롭게 거닐게 됐다. 불국로와 석굴로, 보문순환로 등 사적지를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됐다. 

 관광객을 수용할 인프라도 갖췄다. 74년 4월 보문관광단지 건설에 나섰다. 당시로써는 1,300억이 넘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보문호수를 중심으로 46만평에 숙박시설 등 휴양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추는 사업이었다. 국제회의를 할 수 있는 5개 국어의 동시통역이 가능한 1,000석의 대회의실이 갖춰진 관광센터를 지었다. 79년 3월 말 1단계 사업이 완료되고,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PATA)' 총회가 성공리에 열렸다. 

 문화관광도시란 시민이 거주하는 취락지도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취락지 개선사업도 폈다. 상·하수시설과 교통시설, 농업시설, 전기·통신시설, 교육시설, 치수시설의 확충과 보수도 했다. 현재의 경주의 도시구조가 그때 완성됐다고 하겠다.

 울산과 경주는 이처럼 지난 개발연대에 도시틀의 바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경주는 울산과 달리 개발에 직접 참여한 이들이 기록한 개발과정을 서술한 책을 갖고 있다. 1981년 민·관 참여자들이 경주개발동우회를 만든 뒤, 98년에 '그래도 우리는 신명바쳐 일했다'란 책을 펴냈다. 당시의 현장상황과 숨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책이다. 

 울산은 그런 책을 갖지 못했다. 공단조성 50년이 돼서야 뒤늦게 개발과정을 서술한 책을 펴냈다. 그것도 참여자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제3자가 취재하여 기록한 책이다. 생생한 현장상황을 느끼기에는 모자랄 수 밖에 없다. 울산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미래발전을 위해서라도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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