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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가토크를 하면서 내 그림이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는지, 또 그림이 감상자를 어떻게 힐링할 수 있는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림이 꼭 메세지를 전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누구를 치유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 또한 아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역할을 하기 위해 화가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화가로써 할 수 있는 역할을 할 뿐이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걸려진 그림을 보는 것으로 눈도 마음도 즐거워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힐링이 되는 것이다.

 평면상에 점과 선과 면이 만나 화면이 구성된다. 작가의 생각에 의해 그려지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하면서 화면이 재구성된다. 이것이 바로 회화의 본질이며, 작가의 감각과 생각으로 인해 만들어진 화면이 바로 그림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먼저 아이디어스케치로 많이 생각하고 화면에 바로 옮겨지는 작업보다, 화면 위에서 그려나가면서 생각하고 지워내고 또 그려가면서 화면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 나에게는 더 매력적인 작업이다. 내가 아끼는 물건, 매일 오가는 길목, 일상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뜰리에 등 이것들이 무작위하게 펼쳐지는 것으로 작업이 시작된다.

 

 


 오늘 소개할 그림  'Moment of transparency Ⅰ'(투명한 각)의 소재는 쓰레기와 매일 새벽마다 그것을 뒤지는 까마귀이다. 도쿄의 일반적인 새벽풍경이다. 특히 이른 아침 신주쿠의 가부키쵸를 통과해야 한다면 방금전까지 마시고 먹은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그것을 마구 뒤지는 큰 까마귀떼의 위협을 느껴야만 할 것이다. 추하거나 혐오스런 것이 그림의 소재가 된다고 미간이 찌푸려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미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 또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모에루고미(타는 쓰레기), 모에나이고미(타지않는 쓰레기), 가라스(까마귀), 도로 위의 프린트 등 적어도 세 장 이상의 하도가 중첩되는데, 이것은 한정되어진 평면이라는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면서 평면이 가지는 한계에 대한 갈등을 해소시켜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여지는 화면의 색이 그 깊이감을 증명해준다. 여러가지의 다른 푸른색이 수없이 겹쳐져 흡수되면서 오묘한 색이 나타나고, 어떤 부분은 예측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색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색이 매력적이라면 물감의 색과 입자번호를 순서대로 기록해 두지 않으면 어쩌면 다시는 만들지 못할 지도 모른다. 이것이 석채의 큰 장점이자 또 단점일 것이다.

 오른쪽에 3/1쯤 그어진 곡선은 화면의 중심에 반복되는 일상의 커다란 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짐작케하고, 그 일상의 부분인 여러 개의 작은 원들이, 남겨진 수직선과 수평선 사이에 흩어져 있다. 그 작은 부분들 속에서 다시 직선과 곡선이 흘러나와 나의 일상을 이어주고 그 부분들 중에 가장 기억되고 싶은 것만이 붉은 색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화면상에 많은 요소들이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예로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화면 안에서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해서 그것이 그림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워내고 또 그려내는 것을 반복하며 화면과 호흡하는 행위와 그 감정들이 색이 되고 선이 되고 면이 되고 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공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화면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여러분들은 알고 있을까?

 

 

그림 - 'Moment of transparency Ⅰ'(투명한 각), 한지에석채,145x145c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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