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영과 함께하는 울산근교산행] 시살등上
[진희영과 함께하는 울산근교산행] 시살등上
  • 울산신문
  • 2015.08.0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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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핀 싸리꽃길 따라 오르는 능선, 원시 그대로의 멋 품어

▲ 경남 양산시 원동면과 하북면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영축산의 단조성과 이어지는 영축지맥의 한 구간인 시살등. 사진은 시살등에서 바라본 죽바우등 모습.

낙동정맥은 가지산에서 배내고개를 거쳐 간월산과 신불산을 지나 영축산에서 허리를 틀어 정족산과 천성산으로 이어진다. 영축지맥(靈鷲支脈)은 영축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함박등(1052m), 죽바우등(1064m), 시살등(981m), 오룡산(949m), 염수봉(816.1m)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45.8㎞의 짧은 지맥이지만 능선은 대체로 육중하고 잘 알려진 산들이 속해 있다. 이중 시살등과 오룡산은 영축지맥의 한 구간으로 능선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은 일망무제(一望無際)다. 또한 계곡이 깊고 수량이 풍부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기도 하다. 약 10여년전에 방영된 '달마야 놀자' 영화도 시살등 서쪽 계곡 통도골에서 촬영됐을 만큼 청정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영축산 단조성과 이어지는 영축지맥 구간
발길 뜸한 원시림·깊은 계곡 낀 청정지역
임진왜란 최후 저항지 치열한 역사 현장

▲ 도태정골 초입 시멘트 사방보.
# 도태정골서 산행 시작
이번 산행은 영축산 서쪽사면에 해당하는 도태정골을 시작으로 하여 영축능선인 시살등과 오룡산을 소개한다. 산행은 장선리 느티나무가든 맞은편 잠수교에서 시작한다. 가지고 온 차가 있다면 도로 왼쪽에 주차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길 왼쪽으로는 배내천이 길게 이어지고 밀양댐으로 흘러가는 계곡물을 바라보면서 잠수교를 지난다. 전원주택 앞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돌아서 도태정골로 향한다. 갈림길 옆으로는 잘 단장된 전원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주택단지를 지나 개울 가까이 가면 산골짜기에서 굴러 내려오다가 멈춰선 듯 한 거대한 바위덩어리 위에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 계곡이 보이고 옆으로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사방보가 보인다. 사방보를 기준으로 도태정골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도태정골은 통도골과 도터진골의 물이 합수되어 흐르는 골짜기를 말한다. 통도골은 통도사의 반대편에 있는 계곡으로 원동면 선리 새들마을에서 통도사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옛길이었다. 계곡 길이는 약 2㎞ 정도로 시살등 서쪽 신동대굴(窟)까지 이어지는 단장천의 지류이기도 하다. 도터진골은 도태정골이라고도 하는데, 오랜 옛날 전국을 떠돌며 역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있었는데, 선비는 아무리 공부에 매진하여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는 중 우연이 이 골짜기를 발견하고 들어와 공부에 정진한 끝에 도(道)가 텄다는 골짜기다. 계곡은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탓인지 마치 원시림에 가까울 정도로 숲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으며, 계곡물은 완전히 속살을 드러낸 채 흘러간다. 도태정골 초입에서 출발한지 10여분. 약 십여 년 전에 방영된 '달마야놀자' 영화촬영지인 조그마한 소(沼)에 도착한다. 폭포는 높이가 3m정도, 소의 둘레가 20여m쯤 되는 아담한 폭포다.   

▲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지였던 소(沼).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맑은 물과 나무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지저귀는 산새소리, 낮선 이방인을 발견하곤 황급히 도망치다가 다시 발 가까이 다가와 교태를 부리는 다람쥐 모습. 이 모두가 아직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멋을 간직하고 있음이 아닐까?
 달마야놀자 영화촬영지인 소(沼)를 뒤로 하고 왼쪽 산길을 따라 10여분 오르다보면 오른쪽 발 아래로 높이가 7~8m, 소의 둘레가 10여m인 통도골 선녀폭포를 만난다. 폭포는 1폭포와 2폭포로 나누어 떨어지는데 1폭포는 높이가 3m, 2폭포는 높이가 4m정도다. 폭포는 약간의 누운 형태로 통도골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폭포 옆으로는 바위 이끼를 비롯한 바위채송화, 부처손 등이 자생하고 있으며, 길게 늘어진 나무뿌리를 바라보면서 생명의 소중함도 느껴본다.

 선녀폭포를 감상한 뒤 계곡을 따라 위로 올라가도 되지만 주의를 요한다. 내려갔던 길을 다시 돌아나와 주 등산로와 합류한다. 계곡은 깊이를 더해갈수록 세찬 물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고 완만한 산길은 도태정골 갈림길까지 이어진다. 조금 뒤 도태정골 갈림길에 도착한다. 이곳에 계곡은 둘로 나누어진다. Y자 계곡에서 오른쪽은 도터진골이고, 왼쪽은 통도골이다.(이곳을 기준으로 도태정-2.5㎞, 양산통도사-10㎞이다.) 신동대굴(窟)을 보려면 왼쪽 통도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은 점점 높이를 더해 가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를 친구삼아 조금씩 오르다보면 신동대굴 약 100여m 조금 못 미치는 지점 바위전망대에 도착한다. 산길은 약간의 너덜과 급경사를 이루다가 전망바위를 지나면 다시 완만한 길로 바뀐다. 전망대바위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50여m쯤 올라가면 왼쪽으로 약간 꺾어지는 지점에서 관음죽 군락사이로 신동대굴이 희미하게 보이고, 조금 뒤 신동대굴에 도착한다.  

▲ 신동대굴 안에서 바라본 풍경.
# 길이 20여m 옆으로 길게 파인 '신동대굴'
신동대굴은 성인이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크다. 길이가 20여m, 폭이 5m정도로 바위를 천정으로 하고, 옆으로 길게 파여져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굴(窟) 정면기준 왼쪽 천정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누군가가 갖다 놓은 물 항아리가 있어 식수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동대굴을 뒤로하고 관음죽 군락지를 빠져나오면 시살등으로 오르는 산길로 접어든다. 잠시 후 능선갈림길에 도착하게 되는데, 오른쪽 진행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이정표가 있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나아가면 주 등산로와 연결된다. 왼쪽으로 내려서면 청수 우골로 내려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양산통도사-8㎞, 상선 팜스테이마을-5㎞, 시살등-0.4㎞) 시살등을 오르는 안부에서 시살등 정상을 바라보면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 한 봉우리로 보인다. 시살등으로 오르는 평원은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는 스스로 바다가 되고 시살등을 섬으로 만들었다. 시살등으로 오르는 산길 주변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흘린 선혈처럼 싸리꽃이 붉게 피어 있다. 싸리꽃이 선명한 색조로 무리지어 피어있는 곳을 보기란 드문 일이다. 작은 싸리꽃 하나하나가 핏빛 눈을 부릅뜨고 왜군을 향해 함성을 지를 것 같다. 조금 뒤 시살등 정상에 오른다.
 
# 왜군 피해 전열 정비했던 시살등
시살등은 경남 양산시 원동면과 하북면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영축산의 단조성과 이어지는 영축지맥의 한 구간이다. 시살등의 동쪽 양산시 지산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축산의 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데뫼식 석축인 단조성(丹鳥城)이 있었다. 당시 아군은 단조성을 기점으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산성이 함락되었다. 산성에서 후퇴한 아군이 이곳 시살등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전투를 시작하였고, 몰려드는 적을 향해 화살을 전부 퍼부었다. 해서 이 봉우리의 이름을 화살-시, 화살-살, 돌비탈 길-등으로 이름이 붙어졌다한다. 시살등 정상에서의 경관 또한 대단하다. 동으로는 통도사 전역과 정족산, 천성산이 지척에 있고 그 옆으로 대운산이 일자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향로산과 재약봉, 코끼리봉이 재약산(수미봉)까지 이어지고, 그 뒤로 천황산(사자봉)이 운무속에 아련하다. 이곳에서 한피고개(우 청수골초입)-0.4㎞, 영축산정상-3.8㎞, 오룡산-2.4㎞, 죽바우등-1.3km 이다.    다음주에 계속
 산악인·중앙농협 정동지점장

▲ 신동대굴
▶신동대굴 전설
이곳에 약 400여년 전 신동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영축산 산중턱에 있는 천연석굴에서 술수공부를 연마하며 끝내 도통해 신비한 행적을 많이 남겼었다.
 그는 특히 축지법에 능해서 하루 저녁에 한양을 오갈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오만해져 그 술수를 이용하여 한양의 궁녀들을 강간하기도 하고, 낙동강의 잉어를 잡아먹기도 하며, 나쁜 방법에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나라에서는 궁녀들에게 몸에 명주 끈을 매어 두었다가 신동대를 보게 되면 명주실타래를 신동대 옷에 꿰어 놓으라고 명하였던바 결국 나라에서 신동대가 있는 곳을 탐지하게 되어 잡아오라 하자 그는 즉시 중국으로 도망쳐 새벽나절 중국의 안동 땅에 도착하였다.
 때마침 어느 노파가 마당을 비로 쓸면서 호통을 치기를 "조선에 있는 신동대는 하루 저녁에 수만리를 왔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뭣들 하느냐"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신동대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임을 알고 자신의 부질없는 짓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노파에게 "어찌하여 저를 알아 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노파가 답하기를 "한양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장날에 만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마시오"라고 말한 뒤, 안채로 홀연히 들어가 버렸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그의 도술을 의롭게 써서 임진왜란 때는 왜군을 무찌르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 그는 자신을 깨우쳐 준 노파의 예언을 잊어버리고 장터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말았다. 결국 그는 그 날 바드리고개를 넘어오다 죽고 말았다.
 그 뒤 신동대가 살던 동굴에는 어떤 할머니가 들어와서 걸식을 하며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동굴 한 모퉁이에서 할머니가 먹을 만큼의 쌀이 흘러 나왔다. 이 할머니는 욕심이 생겨 쌀 구멍을 넓혔다. 그랬더니 더 이상 쌀이 흐르지 않고, 대신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예전처럼 걸식을 하며 고생을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굴을 신동대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 '신동대굴'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바위 천정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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