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시인: 1960~1989년.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안개' 등단. 시집 '입속의 검은 잎' 등.


▲ 류윤모 시인
가슴 에이는 시간을 삭여 낸 후 사랑했던 사람을 닮은 실루엣이 어룽거리며 신호가 바뀐 신호등 맞은편에서 마주 걸어 올 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던 기억이 한번쯤이라도 있었던가. 사랑이란 생각의 량. 사량이란 말이 변해서 된 어원이란 설이 있다.
 지금은 만나질 수 없는, 기억 속에서 화석이 돼버린 떠나간 사람을 돌아보게 하는 시가 요절 시인 기형도의 이 시다. 기형도는 얼마나 마음에 상념이 많았으면 '너무 많은 공장'을… 사랑이 아니라면 그만한 상념이 눈덩이처럼… 사랑을 잃고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질투라니 실로 잔인하다.
 이 질투를 앓는 자.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었다가 돌아오곤 한다. 그 사람과 같이 걷던 들길. 추억이 새겨진 장소. 우리에게 그 청춘의 그림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드리워져 있었던가.
 결국 시인은 질투 때문에 사랑에 실패 했노라,는 자기 고백의 뒤늦은 참회, 자기애가 없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허구라는 것을 실토한 것. 잃은 사랑을 찾아 헤매다 그가 이미 스스로 예감한 대로 힘없는 책갈피가 종이를 툭 떨어뜨리듯 침침한 심야 극장에서 마지막 숨결을 놓아 버린다. 그의 사후 나온, 상실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입속의 검은 잎' '질투는 나의 힘' 등 시편들이 아직도 절망하며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강력한 자기장을 지닌다.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그의 시들은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등 애소 짙은 비련의 음색을 남기고 요절한 가수 김현식의 노래처럼 돌올한 비장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그로테스크 센티멘털리즘에 대해 사후 그에게 쏟아진, 신드롬에 가까운 무비판적 찬미가 가능했을까 싶은 것이다. 그가 생존해 있었다면….
 절제되지 않은 자괴감이 청춘에 영합하기 위한 신파조의 진부한 심리 코드라는 혹독한 비평이 일진 않았을까? 죽어야 신화가 되는 법. 그의 유서나 다름없는 마지막 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빈집) 헌사하듯 촛불을 켜놓고 소리내 읽어야겠다. 젊은 시인의 사랑과 쓸쓸한 죽음을….  류윤모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