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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西歸浦), 동쪽으로 가요
                                                                   
                                                                                             유안진

해와 달을 따라가다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서
돌아서 가요
해가 돌아가는
달이 돌아가는
그대가 돌아가는
서쪽
도대체 돌아가는 길은 왜들 서쪽인가
해와 달이 떠오르는 거기라서
그대도 나에게
해로 달로 떠오르나요 
 
가도 가도 줄곧 달아나는 서쪽으로
가고 있는 그대에게 닿으려면
동쪽으로 가는게 질러가는 거라고
지구는 둥글어서
가다보면 반드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요


● 유안진 시인 - 1941 경북 안동. 1965 '현대문학'으로 등단. 정지용문학상 수상 등. 시집 '달하',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 외 다수.

  류윤모 시인
■ 여행노트
사랑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 안고 도는 것.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도는데/ 우리 집의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왜 몰라(중략)/ 저 코흘리개를 언제나 길러서 낭군님을 삼아야 하나"하는 옛 여인의 한이 서린 정선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 가망없고 기약없는 사랑을 기다리는 시선도 눈물 젖은 곡선으로 휘어 있다.
 세월이 몇 바퀴나 돌고 돌아도 만나질 수 없는 불귀의 사랑. 서쪽으로 서쪽으로 하염없이 가도 만나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차라리 거꾸로 동쪽으로 오시면 만나지리라는 애소어린 역발상.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서귀포인가. 옛 선비들이 이따금 찾아갔을 애틋한 기생 이름 같은 애월이나, 백록담이니 섭지코지니 입속에서 굴리다보면 처연하게 그리워지는 이름들이 제주도 지명들이다.
 서귀포. 서쪽으로 귀의하는 포구란 뜻 아닌가. 서쪽이라는 제시적 방향성은 문학적으로도 깊은 함의를 지닌다. 미당의 시 '冬天'에 나오는 西으로 가는 달. 김춘수의 서풍부. 서쪽은 찾아드는 곳. 생리적으로 보편적 여성성은 정주성, 수용성이고 남성성은 운동성, 진행성이다. 그러니 이 시는 여성성인 서귀포가 남성성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연시의 형태다. 기다림은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펼치리라" 황진이의 시조처럼 잠 못 이루고 기다리는 여인에게 기다림의 밤은 그 마음이라도 썩뚝 잘라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고 싶을 정도로 길고 길었을 터. 단숨에 비행기 편으로 날아들 수도 없고 터벅터벅 산 넘고 물 건너던 시절이었으니. 아마 요즘 같으면 바보야. 네비게이션 찍고 해안도로 따라 쭉 오라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오면 낙엽 지는 쓸쓸한 심사를 달래며 잊고 살아온 옛 여인의 이름같은 서귀포를 찾아 하룻밤쯤 묵은 회포라도 풀고 올 일이다. 류윤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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