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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두
시인·소설가

매월당 김시습은 선객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나는 한때 매월당에 심취하여 그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첫 수필집의 표제를 '천도(天道)이렇거늘'하는 그의 시 한구절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그가 울산에 발걸음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언젠가 대곡박물관이 정몽주, 점필재 등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이 울산을 다녀간 흔적을 모아 전시회를 가질 때에도 그의 이름은 찾을 수 없어 그런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울산의 큰 인물 이예 선생이 통신사로 도일하여 일본 국왕을 만나고 귀국하고 난 다음 사절로 온 준장로란 일본승이 울산의 염포 왜관에서 체류하고 있을 때 매월당과 자주 만나 차문화에 대한 지식을 주고 받으면서 쓴 시가 전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나마 이 같은 사실을 알게된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고 필자가 평생의 과제로 삼고있는 것에 대하여 사실 여부를 밝히는 데에도 한걸음 나아가는 일이라 생각돼 기쁘기만 하다.
 준장로가  남긴 시부터 적어본다.

 멀리 떨어진 고향의 노래에 쓸쓸해 지는데/古佛에 산꽃은 적막감을 달래주네//무쇠주전자에 차 끓여 나그네를 대접하려 香을 사르도다/ 봄은 깊어 달빛이 문틈으로 새어들고/노루새끼 약초밭을 밟고 가네/선경에서 맛보는 여정은 아담하여라
 -후략-

 이 시를 음미하면 그 시대의 승려생활이 떠오른다. 매월당이 준장로와 밤을 새워 이야기 한 다도(茶道)의 경지,  떼집에 안치한 불상 앞에 꽃을 꽂고 무쇠주전자로 차를 달이며 질그릇 화로에 향을 사르면서 선(選)의 경지에 빠져있으니 우연히 노루 새끼가 약초밭을 지나가더라는 것이다.
 준장로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일본에서 조차 확실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만 당시의 인물로 조선에 사절의 정사로 와서 염포 왜관에 체류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일본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세속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차로 선경을 이루는 일본 초암다도의 원류는 이를 계기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매월당이 경주 남산에 초막을 짓고 차를 마시며 은둔생활을 하던 전통이 바로 염포에서 준장로가 매월당에 전수한 사실. 그리고 1801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이 다산(茶山)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에서 19년의 세월을 자연 속에서 차를 끓이던 모습은 그대로 이어져 일본에 전해진 것이 일본 초암 차생활이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에게 이 사실의 자료를 전해준 재일 한국사학자 이진희 박사 그분은 김해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이 대학원을 나온 다음 줄곧 명치대에서 교수를 지내신 분이다. 이 교수는 필자의 초청으로 울산에 와 임진왜란 때 학성에서 가등청정과 울산의 의병들이 싸운 내용을 강연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이진희 교수는 일제가 교묘하게 조작해놓은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바로 잡은 분이다. 앞에서 필자가 밝힌 평생의 숙제가 된 과제를 짚어 주시고 만약 그 과제를 바로잡는다면 일본인들이 한국을 과소평가하는 버릇을 고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렇게 되면 울산을 동경하는 일본사람들이 숱하게 울산을 찾을 것 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편의 논문을 쓴 다음 이 교수님을 찾아 갈 것이지만 이 소망이 이루어질지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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