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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면서 한국을, 한국의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러 볼 수 있다. 그중에는 나와의 소중한 인연으로 만나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를 나누면서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사람도 많지만 서적을 통해서 직접 만나본 사람보다 더 가깝게 존경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야나기 무네요시란 일본인이다.
 요즘 최순실 게이트로 광화문 광장을 백만명의 촛불이 별처럼 빛나고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때도 그랬거니와 얼마 전 지진이 흔들고 간 다음에 경주를 돌아 보았을 때도 그를 잊지 않고 떠올려 보았다.
 '야나기 무네요시' 그의 한국이름은 유종열이다. 한국이 좋고 한국인들이 문화 민족이어서 한국이름을 지어 불러 달라고 했다 한다. 살아있으면 어디라도 찾아가 덥석 껴안고 싶은 사람이지만, 오래전 하늘나라로 가버린 사람이다. 그는 경술국치 후 데라우찌가 총독으로 있을 때 한국에 있으면서 광화문이 옮겨진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다. 왜 제자리에 있어야할 귀한 문화재를 헐어 망가뜨리느냐하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철저한 언론통제가 시행되던 시기에 총독에게 맞서 그것도 무단 정치로 뱀처럼 독기 서린 압정을 일삼는 데라우찌와 정면으로 대항하며 자신의 정의감을 여지없이 내보였던 것이다. 그는 또 한국 고유의 뛰어난 미술품을 보존해야 한다면서 그것을 보존할 미술관 건립 운동을 벌여 마침내 서울에다 미술관을 세우게 했던 것이다. 1924년의 일이었다.
 한국의 산천을 돌며 문화답사에 나선 어느 날 석굴암 앞에 서게 되었고 그 웅장하고 거룩한 아름다운 예술의 극치에 감동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쓰게 된다.
 "위대한 문화를 가진 나라와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 하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라고 일본인으로서는 민족 반역자로 몰리는 글을 신문에 대담하게 실었던 것이다."1916년 9월1일 상오 6시반, 밝은 햇살이 바다를 넘어 굴속의 불타 얼굴에 닿았을 때 나는 그 곁에 서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의 추억이다. 그와 그를 둘러싼 여러 불상들이 그 놀랄만한 서광에 의해 선명한 그림자와 흐르는 듯한 선을 보여 준 것은 그 순간 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또 신문에 발표했으니 총독 데라우찌의 표정은 어떠 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데라우찌는 신문을 보다가 책상을 치고 벌떡 일어나서는 그길로 경주로 달려갔다. 몰래 숨어들어 석굴암을 본 그가 특유의 야성을 숨 길리 없다.
 "당장 반출하라!" 석굴암을 일본으로 반출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즉시 반출을 위한 기술팀이 구성되고 부산을 떨며 회의를 거듭하고 난 뒤였다. 반출팀장이 풀죽은 자세로 총독에게 보고한 내용은 반출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석굴암을 헐어 옮길려면 해발 560m 이상의 험준한 토함산에서 감포항까지 도로를 닦아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돈이 들고 그럴 경우에 석불에 훼손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의 저항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이 그랬고 여러 상황을 놓고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데라우찌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석굴암은 겨우 수난을 면했지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엄청나고 황당한 흉계가 있었던 줄도 모르고 살아온 우리들이었다.
 언젠가 세계 문화유산을 결정하는 유네스코 학예사들이 사석에 앉아 술잔을 나누면서 담소 중에 있다가 어느 학예사 한사람이 물었다. "자, 오늘 우리가 모처럼 사석에서 한자리에 모였으니 물어 볼까 하는데… 과연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예술품을 든다면 무엇이겠소?" 그러자 그 자리에 앉은 학예사들이 모두 "그야 코리아의 석굴암이 아니겠소" 했다는 석굴암이었다.
 문화민족임을 떳떳이 말할 수 있고, 자긍심을 갖게하는 예술품을 사랑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외친 야나기 무네요시를 그래서 나는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는 인류애로 국경을 초월한 참다운 지식인이었다. 석굴암은 경주에 있고 암각화는 울산에 있다. 야나기의 말을 높이 산다면 인류 최초의 귀한 문화재를 보유한 울산은 문화도시로의 자격을 갖춘 셈이다. 그렇다면 문화도시로 가꾸려는 시민정신이 무엇보다 우선이어야 한다. 울산만이 가진 고래문화를 왜 지우려 하는가?
 그 문화속엔 울산의 꿈이 있었고 장생포의 삶이 울산 시민의 삶이었음을 일러주는 민족의 애환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시끌시끌하다는 소식을 듣고 왠지 문화도시로의 노력을 포기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마음이 삭막해짐을 느낀다.
 얼마전 나는 울산 성곽연구회가 주최하는 세미나를 듣기 위해 울산박물관을 다녀왔다. 자생단체인 울산 성곽 연구회는 이창업 회장을 중심으로 80명의 회원들이 향토의 역사를 알고 거기에서 생성되는 향토애를 그동안 연구해오고 있었다.
 그렇게 회원들이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고 토의하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울산이 진정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려 한다면 이와 같은  단체가 늘어나고 육성 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 일본인의 예를 앞에서 들었지만 위대한 문화를 가진 나라와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해서는 안된다고 했듯이 높은 문화수준을 보이는 도시는 그로인해 모든 분야에 시너지 효과를 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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