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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빔밥
                                                                           권오정

결혼 70 주년 맞는 노부부 집 앞, 조가비처럼 차가 줄 서 있다
빛 좋은 날 옮겨 여름 태풍도 잘 견딘 나락처럼 마당에 가족들로 북적인다

9 남매를 둔 노부부, 손자손녀 이름 외우기도 만만찮다 증손자는 그냥 애완용 강아지다
부르고 싶은 얼굴과 어긋나게 이름이 나오자 아예 눈 맞추고 손짓으로 부른다
마당 한 켠에서 장작불로 추어탕을 끓이는 아들, 샘가에서 빨래를 퍽퍽 치대는 딸, 평상 위에선 사위와 며느리가 누런 호박전을 부친다 노부부 마루에 걸터앉아 증손자들 뜀박질 눈으로 따라가며 함께 뜀박질하고 얼굴 주름 안으로 자식도 아래 자식도 아슬랑 아슬랑 들이고 있다

생활도 성격도 무늬도 다른 발자국들이 마당 위에 엉켜 있고 그 위에 계란 노른자처럼 아이들 웃음소리 까르르 얹혀 있다 노부부 가을마당을 종일 비벼 먹는다
(시작나무 동인지에서)

● 권오정 시인: 경북 영주 출생. 2006 문학 저널로 등단. 울산문인협회 회원, 두레문학회 회원.


볕 좋은 어느 가을마당에서 펼쳐지고 있는 칠순 잔치 광경이 눈에 선하다. 경향각처에서 온 자녀들의 차가 조가비처럼 엎드려있고 전 부치는 고소한 냄새, 풍성하고 먹음직스런 음식 준비를 하는 단란한 가족들, 눈에 밟히는 손자들의 재롱을 따라 잡는 노부부의 자애로운 눈길.
 요즘 세상에 결혼 70주년이라니, 황혼이혼이다 가족 해체다 그늘진 세태의 이면엔 아직 이런 단란하고 다복한 대가족의 모습도 남아 있었구나 싶다.
 이 시를 보며 미당문학상 당선작이기도 한 문인수 시인의 '각축'이란 시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어디론가 곧 팔려갈 어린 염소들이 뿔을 똑딱 거리며 다투는 모습을 보며 화자는 먼 훗날 저렇게라도 뿔에 각인된 형제임을 기억해 낼까 라는, 가슴 저미는 풍경이었다면 이 그림은 그 대척점에서 본 맛깔스럽게 비벼진 비빔밥 같은 행복한 가족사 적 추억으로서의 각인일 것이다.
 이 시에서의 주안점은 관념을 벗은 '다르게 보기'의 시각적 신선함 외에도 의도적으로 시행에서 마침표를 배제한 것은 이 시가 육식의 靜的 하드웨어가 아닌 초식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동의 소프트웨어임을 암시하고 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고 첩첩 근심 걱정의 지층이 겹쳐 이룬 스판 재질의 얼굴 주름 안에서 태풍을 잘 이겨낸 알곡 같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손자들이 뛰노는 슬하의 광경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인자로운 표정. 칠순 잔치판을 엉뚱하게 맛깔스런 비빔밥으로 읽어내는 見者로서의 독특한 시선.
 갖가지 신선한 채소들이 어우러지고 버무려져 고소한 참기름에 비벼지고 계란 노른자 하나 얹혀 진 맛깔스런 한 그릇의 비빔밥처럼, 잘 익은 가을마당이 비벼내는 비빔밥.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태어나자마자 생명력이 다하는, 존재조차 불분명한 연산 2만 여 시의 신생아들 중 생명력으로 오래 살아남아서 뇌리에 새겨질 만한 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류윤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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