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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의사는 상담가로서 자신의 기분이 정말 그런 것이 아니면 상담에 나서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 왜냐면 치료자의 진심을 드러낼 때만이 환자도 그들의 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명 감정을 통제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그렇다고 '끊임없이 미소 짓고 있어야하는 비행승무원들 같이 입꼬리를 자연스럽게 올리고 있는 훈련'으로서 이루어진 상담으로는 치료해나갈 수 없는 '감정노동'이 아닌 감정 작업을 해야 하는 직종일 것이다.  

 정신질환에서 논리나 언어로 접근이 안 되며 정서적 접근이 되어야 하는 때가 있는데 이런 때 감정이라는 것이 더 근본적인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감정이 아프지 논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고 필자의 멘토가 지적한 적이 있는데,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감정은 감정으로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감정이 노동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감정을 상품으로서 판매해야하는 경우라는 것인데 결코 감정이라는 것은 그런 수단이 될 수 없다. 인간이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듯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감정이 아닌가.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물건 다루듯이 다룰 수가 없다. 그것이 제일 미묘하게 나타나는 곳이 감정현상에서인 것 같다. 인간은 존재자 속성이 아니고 존재인데 그 존재는 감정조율과 일치하여 드러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우리가 노동을 한다고 할 때의 그런 근육이 만들어내는 의지로 움직이는 운동 같은 것이 아니다. 운동하는 의지와 관계없는 '불수의적' 움직임으로서 감정은 내가 그것을 발휘한다기보다는 감정이 나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감정은 그냥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하게 되는 것과도 다르다. 어떤 것이 감정을 불러일으켜 내가 그것을 느끼지만 그런 감정을 가짐 속에는 언제나 동시에 자기 자신을 느낌이 놓여있게 되며 자기 자신을 느낌 속에서 내가 나 자신에게 드러나는 것으로서 자신의 '인격'의 존재 같은 것이 나타나는 것이기에 감정노동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그냥 감정을 억압한다고 하는 표현이 감정현상을 더 있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회적 역할에만 자기 자신을 맞추느라 내 속의 감정을 억압한다면 사실은 내 인격을 소외시키는 점이 있고 이것은 사실 업무의 대상인 고객들과 직접적으로 대면 접촉하며 그런 접촉과 관계가 지속적으로 감시되고 평가되며 업무실적에 반영되는 근로자에게 두드러질 것이다. 이런 때 자기 자신의 그런 사회적 역할 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감성에도 관심을 갖으며 그것을 균형 잡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은 쉬워도 실천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페르소나라고 하는 사회적 역할과 맞지 않는 것은 많이 억압되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으로 마주하기 싫어하는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림자라고 하는데 이 그림자가 투사될 때는 보통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 그 감정에 결부되어 있는 대상과 만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 불쾌한 감정이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그냥 사회적 역할만 하지 감정을 살펴보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적인 경우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그림자를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고객을 응대하는 것을 자신의 생계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두렵거나 불편하여 억압한 어두운 부분 즉 그림자를 대상에게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림자는 그렇기 때문 더욱 짙어 질 수 있는데 그런 그림자가 투사될 때 그것이 그냥 사회적 상황에서의 감정인지 아니면 자신의 개인 그림자의 투사에 의한 과장된 감정인지를 상담자는 자기반성을 하면서 항상 살펴야 한다. 그림자를 살펴서 잘 살려내는 것이 사실은 상담자 자신과 대상 모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러지 못하고 그냥 역할을 하는 것에만 매달려 결국은 사회적 역할도 어렵고 자신의 감정도 소진되어 버리고 마는 생활이 되기도 한다.

 감정을 잘 살피는 것으로 그림자를 살려내는 것뿐 아니라 우리는 세계와의 관계기능을 이끄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와의 관계에서 항상 이미 우리는 기분의 조율성에 일치하여 우리의 인격의 존재를 개현하고 있는 셈인데 이런 개현을 통해 서로간의 진정한 관계가 일어나기 때문 감정의 정도가 세계와의 관계정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런 세계관계가 위축되어 있는 것이 소위 마음의 병적 상태일 것이다. 치료는 환자가 치료자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세계 관계를 통해 새로운 관계가능성을 경험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인데 이렇게 관계가능성이 기분변화로서 나타날 때에는 아마도 그 관계정도인 감정이 노동은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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