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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의 일이다. 울산의 대표축제인 처용문화제에 관여한 모씨가 국제음악무대를 꾸미면서 재즈뮤직페스티벌로 거액의 행사비를 횡령, 착복한 일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거창한 행사를 축제의 주력행사로 밀어넣은 다음 홍익대학교 앞의 집시류 외국인 거리공연자들을 아주 헐값에 계약하고는 처용문화제에 참여시켰다. 국제대회를 개최하는데 필요한 해외출장비 등을 고스란히 챙겼으니 예술을 팔아 저지른 사기치고는 그 행위가 가히 국제 수준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지금도 복역중에 있지만 생각하면 그때는 아무래도 울산예술에 망령이 끼어들었었다는 생각이 들어 사뭇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재즈가 요즘 다시 고개를 들고 있어 일말의 소회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수백 년 전통의 예술로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있는 엘비스 프레슬리, 폴 앵커, 루이 암스트롱 등 세계적 명가수들이 불러 아낌없는 찬사를 받으며 열광케한 그 노래를 어쩌다 망령에 덮였던 일 때문에 무시하거나 퇴출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계적인 예술이라 하더라도 그 예술이 울산의 풍토와 정서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면 대중에 의해 일고 있는 바람이면 몰라도 예술을 지원 육성하는 곳에서는 보다 세심한 검토를 가져야 할 일이다.

 재즈의 역사를 돌아보자.
 17세기 초부터 유럽인들은 암흑의 대륙이라 불리던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고는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비인간적으로 참혹한 노동을 강요했다. 때마침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어 이들 흑인들은 청교도들을 따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시피강 유역에서 노역에 투입되었다. 그 노예들은 고향과 두고 온 가족들이 사무치게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가축과 같은 대우를 받는 설움을 삼키며 낯선 땅에서 옛 추억을 더듬어 하나둘씩 모여 고향의 토속적인 노래를 읊으며 춤추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 속에는 백인을 경멸하는 반항심이 응어리로 굳어지고 있었다. 재즈는 그들에 의하여 생겨난 음악이었고 그들의 경멸이 응어리로 남은 음악이다. 그리고 재즈는 원래의 시발에서 여러형태로 발달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곡이 연속적으로 발표되어 감성이 빠르고 자극을 받기 쉬운 세계의 젊은이들을 금세 매혹시켰으나 그 내면의 밑바닥에는 상대를 경멸하고 반항하는 원래의 즉흥적인 특징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혹시 어떤 이는 이 글을 읽고 느닷없이 우리가 부르려는 재즈를 왜 째지게 비판하는지 모르겠다고 할지 모른다.
 나는 바로 그 소리를 듣고 싶다. 오늘날 우리의 산업현장에는 대립이 판을 치고 있다. 그곳에는 저마다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투쟁을 펴고 있다. 그 대립 속에는 경멸의 불신과 반항심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울산의 예술은 울산을 실제적으로 몰고 가는 시민들과 산업현장의 근로자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데도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서 격높은 예술로 그들과 한 시대를 동행해갈 수밖에 없다.

 수많은 공장이 있어도 정서를 생산하는 공장은 없다. 모두가 메마른 정서에 밤을 새우며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다들 마음을 차분히하며 유순하게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예술이 감당할 수 밖에 없다. 태양이 꽃을 물들이듯 예술은 인간을 물들인다고 한다. 훗날 우리들의 산업현장에 일하는 근로자들이 경멸과 반항심이 드세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그리고 글로벌 도시로 전진하는 울산이다. 글로벌 도시는 그 시민들이 글로벌 다워야한다. 그래서 이제는 울산의 예술도 몇단계 격을 높여야 할 때이다.

 울산문화재단이 올해 처용문화제에 국제음악잔치를 준비한다고 한다. 기왕에 국제음악을 끌어오려면 한단계 끌어올린 음악을 들려주었으면 한다. 이를테면 재즈보다는 지구촌 예술의 메카 프랑스에서 건너온 샹송은 어떤가? 재언하지만 나는 재즈를 몰아치는게 아니다.

 문청시절, 나는 못말리는 재즈광이었다. 그 시절 재즈의 역사를 처음으로 소설에 상세하게 묘사한 퓰리처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작가 화이브의 소설을 세 번이나 탐독하였다. 그것이 재즈에 대한 상식을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재즈보다는 샹송을 권하는 것이고 그것은 울산의 예술을 더 격을 높이는 꿈이 있기에 하는 소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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