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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문제가 최근 많이 보도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폭력과 따돌림 등 문제로 피해 학생이 자살을 하는 경우까지 있다. 반 학생 9명이 피해 학생에 대해 욕설을 하고 따돌림을 하여 자살에 이르게 되었다는 보도를 접하였다.

 부산 여중생의 경우도 여럿이서 한 아이를 괴롭히며 폭행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는데 어째서 일대일이 아니고 여럿이서 한 아이를 괴롭히는 방식이 되는 것일까. 여러 이론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중에는 한 가족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보고 싶지 않은 어떤 정서적 상황을 감추는 장소로 또는 그곳에 담아두는 장소로서 한 희생양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보기 두려운 감정을 스스로 직면하지 못하고 여럿이서 무의식적으로 한 희생자에게 덮어씌워서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으로 그 복잡한 사회 현상이 다 설명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도무지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인가. 그런 행동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그래서 급기야 자살에까지 이르는 그 파괴적인 결과를 생각해보면 그 행동에 이르게 되는 것이 단지 자신이 보기 싫은 자신에게서의 어떤 감정을 피하는 것으로 그런 '엄청난' 행동을 저지른다는 것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런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이때 피해학생을 도울 수 있는 가까이 학교의 선생님 상담교사 그리고 학교에 네트워크 되어있는 정신건강복지센터 경찰 교육청 그리고 의료기관까지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학교 내 선생님 그리고 각 기관의 역할과 앞으로의 개선 사항까지를 토론해보자고 모였지만 원래 어려운 사안이기도 했지만 네트워크 되어 있는 각 기관간의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갈등이 생긴다는 이유로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갈등이 있기에 네트워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절실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회의적 분위기도 있었다.

 자살예방교육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점도 있다는 언급까지 나왔는데 그래도 예방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반론이 인상적이었다. 예방교육이 심리적 동요를 불러 온 경우라도 예방교육이 자살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고 원래 있었던 자살 충동이 나온 것이기에 예방교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복잡한 자살이라는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우리는 많이 알아야 할 것이다. 삶이 이젠 더 견디기 어려워 자살한다면 그 견디기 어려운 것이 결국 무엇인지를 자살이 이루어지기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려면 그것을 철저히 삶에서 검토해봐야 하는 것일 텐데 안타까운 것은 아직 청소년들은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자신의 생명까지를 빼앗아 가도록 놔두어야 하는 것이 맞나 하는 것을 검토하기에는 체험이 부족하다.

 그리고 이런 것을 검토하기 위한 상담자와의 대화라는 것이 한계가 있다. 그가 상담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느냐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날 토론회 주제중 하나다. 투신시도 당일 학교에 찾아가 피해 학생을 상담하였는데 후속 상담이 미실시 되었다. 이 문제가 개선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인데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응급실에 자살 환자가 오는 경우 상담자와 1차면담은 이루어지더라도 후속되는 면담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매우 적다. 누구나 두려운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개인면담에서의 치료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토론 중 피해학생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일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학교나 우리 사회의 폭력 문제는 사회의 문제지 어느 개인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이런 사회적 노력 없이는 결코 개선이나 진전이 없을 것이다. 우리 각자가 개인이라도 그 자아가 고립점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개인은 없다. 우리는 '세계내존재'이고 세계에서의 의미가 없는 개인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 내에서 평균적으로 기계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면 사람을 평균적 눈앞의 물질로 보고 혹 9명이 1명을 괴롭히는 관계로 떨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네트워크서비스도 따라서 그냥 평균적 물리적 서비스가 아닌 각 상황에 맞추는 서비스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학교가 일차적 서비스 제공의 장소인데 그렇다고 그것이 학교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서비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도 고립점이 아니다. 그를 인도한다는 것은 그의 가족, 사회, 세계를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학교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안내를 받는 그 피해자는 우리 자신이 그것인 인간 '현존재'이며 그는 그의 전체 세계를 가져오는 것으로 그 세계와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하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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