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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중구 성안동 우거의 서창가에 서있다. 천리풍 만리천이라 했던가…. 과연 하늘에 뜬 구름이 온갖 형상의 그림을 그리며 흘러가고 있지만 그 속의 한 찰나에 그칠 50년 저쪽의 세월을 돌아보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나의 얼굴에 여드름이 사라지고 가슴에 제법 끓는 피를 돌리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때 문학의 길에 들어 모범되게 앞서가고 있는 이상숙이란 고향선배가 계셨다. 맏형과 동갑이어서 형님이라 불러도 될 처지였으나 형님보다는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무척 따르고 있었던 것은 국어를 잘 가르치는 교사로 이름을 떨치면서 이곳저곳의 중등학교에서 교사로 초빙하려는 손짓을 다투어 보내는 인기교사였기 때문이다. 또 사모님까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모교인 울산초등학교 교사직에 봉직하고 계셨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 여기고 지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선생님의 인품이 워낙 훌륭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보니 존경심을 갖게 하면서 그렇게 부르도록 했으리라 여겨진다.


선생님은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하여 재학 중 6·25로 인하여 부득이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1950~60년대, 그때의 울산은 문화예술이 거의 없는 척박한 그야말로 한가한 농어촌이었다. 대현중학교를 시작으로 교단에 서게 된 선생님의 인기가 높게 알려지자 각 학교에서 서로 모셔 가려 하는 바람에 제일중, 울산중(학성여중의 전신) 및 울산여고, 울산여상의 교단에 서게 되므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일시에 길러내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김태근, 김인수, 박기태 등과 백양동인회를 결성하여 동인지를 내고 시화전, 음악감상회, 연극공연을 펼치면서 문화예술운동의 씨를 뿌리셨다. 또 이종수, 김상수, 김종수, 김학균, 김규현 등과는 화조회를 만들어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한편 고향후배 중의 인재를 뽑아 장학사업을 활발하게 벌였다.

울산문인협회를 창립할 때는 후배들과 기꺼이 어울려 부회장을 맡아주셨는데 그 초장에 내부적인 사정으로 창립이 무산되려 할 때 선생님이 이루어주셨다. 지금도 나의 기억에 남아있는 선생님의 인품은 실로 남다른 데가 있었다는 생각뿐이다. 문인협회만 하더라도 그때 바로잡아 주셨기에 오늘의 문인협회가 있게 되었고 또한 예총도 생겨나게 되었다.

명다방을 운영하게 된 것도 순전히 문화운동의 사랑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명다방이 문화예술인들의 회관 역할을 할 정도로 문화예술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영업을 떠나 그들의 편의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야당정치인이나 야당계열의 동지들에게는 선생님이 지키고 있는 명다방이 큰 안식처였다. 문인들과 예술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그 때문에 가끔 고향을 찾아왔던 오영수, 천재동, 이시우는 자신들의 친지는 못 만나고 가더라도 이상숙만은 꼭 만나고 가는 것이었다. 심지어 울주군 출신으로 한국문단에서 주벽이 세기로 유명한 박모시인도 이상숙을 만나야 침식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 선생님의 심성을 짐작케 한다. 이런 선생님이였기에 최영근 전 평민단부총재가 잠시 정계를 떠나 제일생명의 사장으로 가게 되었을 때 두 번 세 번 손을 내밀어 서울로 함께 가서 전무이사를 맡기고 사실상 회사를 경영케 했던 것이다. 서울생활을 하면서도 고향후배들을 가족같이 품으며 고향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발벗고 뛰어들었다.

그렇게 한결같이 인정을 베풀며 서울에서 시인으로 문학활동에 열정을 쏟던 선생님이 지난 2015년 6월 그만 영면에 드시고 말았다. 장지를 찾아온 향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애석해하며 선생님의 흔적을 고향 울산에 꼭 남기게 하자고 유족들에게 일렀던 모양이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선생님의 공덕비가 될 시비를 세우는 일이 시작되었다. 중학시절 제자였던 문우 양명학교수가 건립위원장을 맡은 건립위원회는 지난 17일 선생님의 시비를 울산시 중구 복산동의 송골공원에 세우게 되었다. 나는 이 시비에다 선생님과 절친하게 살다간 이 고장 출신 화가 박기태 화백의 흔적을 함께 담아놓았다. 그는 전국단위의 미술단체를 이끌면서 우묵한 서양화가로 활동하다가 세상을 하직했지만 이상숙의 얼굴을 그린 캐리커처 한 작품에도 거장답게 살아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시립미술관이 들어설 구 울산초등학교 정문에서 좌측 편 첫 집이 그의 생가이다. 시립미술관 건립과 함께 울산에 문화 향기를  나게 해줄 것이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가도 그 사람의 향기는 남는다. 복산동 송골공원을 지나치는 시민들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울산 출신의 두 예술가를 기려주시기를 바라면서 시비가 세워질 때까지 시종 도움을 주신 박성민 중구청장과 노선숙 문화관광실장께 거듭거듭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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