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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시들해졌지만 '컬러링 북'이 유행이다. 영어 이름이 붙었지만 별거 아니다. 정교하게 디자인된 그림에 색연필이나 물감을 예쁘게 칠하는 것이다. 스트레스 해소와 집중력에 좋다는 홍보로 인기가 있어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렇게 바탕에 도안한 선을 그대로 두고 색칠하는 방식은 주로 만화에서 쓰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1950년대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고민하던 어떤 작가가 아들이 "아빠는 만화 못 그려?!"라는 한마디에 만화 한 장면을 오려붙이고 색칠한 것을 캔버스에 크게 옮겨 그렸다. 이것이 컬러링이고, 색상만화를 그리는 방법이다. '앤디 워홀'과 함께 1960년대 미국 팝-아티스트로 전면에 나서게 된 '로이 리히텐슈타인' 이야기다. 한 동안 대기업과 갤러리가 비자금으로 얽힌 송사로 언론에 오르내리던 '행복한 눈물'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미국 사회가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로 진입하자 다양한 생활용품이 넘쳐나고, 오락물도 생활 깊숙이 넘쳐나게 된다. 그렇게 일상에 파고든 것 대표적인 인쇄물이 만화다. 색이 들어간 만화는 일정한 간격(보통 인쇄보다는 넓게)으로 색 점을 찍어 표현(인쇄업자의 이름을 따서 Ben-Day dot이라 부른다)한다. 이렇게 만화를 인쇄하는 방식 그대로 캔버스에 확대해서 그린 작품을 들고 리히텐슈타인은 '제스퍼 존스'를 발탁했던 화상 '레오 카스텔리'를 찾아갔다. 단박에 그의 작품이 가진 의미와 상품가치를 알아챈 카스텔리는 곧바로 거래하기로 했다. 리히텐슈타인은 순식간에 일반대중에게 스타가 되었고, 개인전을 열기도 전에 모든 작품이 매진되는 대성공을 거둔다. 레오의 말을 듣고 미리 작품을 본 워홀은 자신은 앞으로 만화를 이용한 작품은 절대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일화도 있다.   


▲ 로이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Happy Rears), 캔버스에 마그나펜, 96.5×96.5cm,1964.

 리히텐슈타인은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꽤 오랫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세계에 만족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만화형식 차용한 작품을 제작하고부터는 이전에 그려 논 작품 모두를 파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리라. 사실 팝-아트는 미국 그리고 미국사회를 가장 잘 표현한 미술사조이다. 2차 세계대전이후 예술문화 중심지가 된 뉴욕은 야심만만했고 자존감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따라서 자신들의 생활과 사고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일에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대로 창조행위를 만들어나갔다. 여기에 정치, 경제와 문화 그리고 미술문화를 성장시킬 수 있는 구조가 갖추어졌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만드는데 어떤 제약도 없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장면 캔버스에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붓 자국을 대형으로 제작하여 주목을 끌었다. 이후에는 유명작가의 작품과 고대의 작품들도 자신의 형식대로 전환해서 제작했고, 만화형식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형식으로 변화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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