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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몹시 궁금할 때가 있다. 얼마 전에 물주머니의 밑이 터진 것처럼 내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이 자신의 코골이 소리에 자다가 놀라듯이 나도 생각지 못했던 험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어 당황했다.

 올해로 다섯 살 된 당마가목이 처음으로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짬을 내어 광주리를 들고 마가자를 따러 갔더니 한 알도 남아있지 않았다. 집 북쪽 골짜기에 사는 새떼의 소행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이 새새끼들이…, 아, 정말이지 너거 내가 그냥 두나 봐라" 체통도 잊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말박줄욕'을 퍼붓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성이란 믿을 것이 못될 뿐만 아니라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람 속은 참으로 알 길이 없다더니 헛말이 아니었다. 평소에 새를 살가워하던 마음은 간데없고 사라진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이 새새끼들, 그냥 두나 봐라" 하는 생각이 며칠이 지나도록 이어졌다.

 '새끼'란 말을 며칠 되풀이하고 나니 반복학습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남편과 산책 중에도 말맛이 묘하던 '새끼'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말하는 새끼란 낱말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못마땅함'이다. 먹이가 궁한 철인 12월부터 4월까지를 여덟 해 가까이 챙기며 함께했는데 한 알도 남기지 않고 저들끼리 몽땅 먹어치운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담겨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사실 어미 새인지, 할배 새인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이런 경우의 새끼란 단순히 어리다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전적으로는 '생물의 어린 것'이나 '놈이란 뜻의 욕'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당연히 후자의 의미로 며칠째 되풀이하며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동생으로부터 안부 전화가 왔다.

 묻지도 않은 마가목 열매 이야기를 했더니 새들이 밀린 공연료를 챙겼다는 것이다. 적막강산인 골짜기에서 날마다 만 가지의 소리로 위로했는데도 염치없이 내가 공짜로 좋아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곱고 이로운 열매를 먹었으니 더 아름다운 노래를 할 거라며 기다려보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공짜가 더 무섭다는 말도 있다. 이는 대가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기실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을 뿐 모든 것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사철 오묘한 소리로 자연의 신비를 알려주며 가슴을 데워주고 생각을 맑게 해준 공에 대한 바른 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갖는 가치에 나는 무심했다. 저녁 산책길에 만나던 숲속으로 깃드는 소리 역시 일상적인 자연의 소리로만 여겼다. 평범한 일상을 위한 수고는 모든 생명체가 다르지 않을 진대 그에 대한 보답은 안중에도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상그러웠던 기운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빚이 있었다. 마가자가 사라지던 날 모처럼 새롭고 화려한 만찬에 즐거워했을 새들의 하루를 상상해 본다. 가지마다 가랑잎처럼 매달려 함께 포만감을 나누었을 것이다.

 서너 해 전의 겨울에 눈이 유난히 많았던 적이 있다. 정원과 산책로에 난 어지러운 발자국은 곤궁한 겨울을 나기 위한 그들의 비애로 다가왔다. 그래서 집안에 있는 곡물을 주변에 내다놓았더니 갑자기 골짜기에 십육분음표가 쏟아졌다. 나뭇가지마다 팔랑이며 새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배탈이 나도 혼자 먹으려 만 가지의 편법을 쓰는 사람들의 행태와는 달리 동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웃으로 공존하면서도 내 입장과 생각을 중심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늘 주변의 생명체를 살피고 배려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자연의 셈법은 나와 많이 달랐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뿐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나치게 취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래하고 난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노래하고 난다는 의미다. 생태계를 위한 위대한 공헌이다. 필시 이번에도 귀한 먹거리를 발견하고 하루를 축제일로 잡았을 것이다.

 이번 가을의 마가자 추수는 밀린 공연료가 되었지만 공짜가 그리 말랑말랑한 대상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뜻밖의 청구서가 날아든다고 크게 흥분 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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