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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이니 혼술이니 해서 요즘 나홀로족이 하나의 추세라고는 하지만 나홀로족에도 급이 있는 모양이다. 혼자 어디까지 해봤어? 하는 물음이 인터넷상에 떠도는데, 혼밥족의 경우, 예컨대 편의점에서 혼자 김밥이나 도시락 먹기가 입문 단계라면 일반식당에서 혼자 밥 먹기는 중간 단계, 고깃집에서 남의 눈치 안보고 혼자 고기를 굽는 정도라야 혼밥족의 진정한 지존이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혼자 영화보기는 어떤가. 이건 조조나 심야, 혹은 평일이나 주말 같은 시간대로 나누어야 할까, 멜로나 액션, 공포물과 같은 장르로 나누어야 할까. 두 경우를 모두 고려하여 심야에 극장에서 혼자 공포영화를 본다면 혼영족의 고수라 할 수 있을까.

 나도 영화를 좋아하지만 혼자 보는 편은 아닌데, 올해 들어 몇 편의 영화를 혼자 보게 되었다. 사실 처음 혼자 본 영화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대전극장인가에서 본 '파비안느'이다. 가족과 친척들과 함께 왁자하게 사진을 찍고 점심을 먹은 다음, 나는 집 대신 극장으로 갔다. 교복을 입는 학창시절이 이젠 정말 끝나는구나 하는 비감함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교복을 입고 저지르는 마지막 일탈행위로, 그러나 영화는 나의 비감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업영화로 사람이 너무 많아 뒤에 서서 볼 지경이었다. 내용조차 잊어버린 그 오래 전 영화에서 기억나는 건 '파비안느'라는 영화의 제목과, 여자 주인공이 치마를 걷고 스타킹에 감추어둔 권총을 꺼내드는 장면이다. 그래서 그 영화를 007과 같은 첩보영화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 흥미가 생겨 검색해보니 국적이 다른 친구들이 서로 전쟁을 체험한 뒤 5년 뒤 재회하게 된다는 내용의 전쟁영화였다. 30만 관객이 몰린, 당시로선 매우 성공한 영화였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꼈던 막연한 외로움 때문인지, 충동적인 관람이라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그 뒤로 다시 혼자 보기를 시도하지 않았다. 입문 단계에서 좌절했다고나할까.

 그런데 올해, 다시 혼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 때문이다. '옥자'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자 대형 상영관들이 항의의 뜻으로 개봉을 하지 않은 것. 울산에선 유일하게 현대예술회관 영화관에서 상영을 하였는데, 나는 퇴근길에 옥자를 보러 그곳에 들렀다. 굳이 시간이나 취향을 조율하지 않아도 되니 번거롭지 않고 편해서, 이것을 계기로 몇 편의 영화를 혼자 보게 되었다. 다큐인 '공범자들',  그리고 '매혹당한 사람들'과 '윈드 리버' 같은 드라마류. 주로 평일 오전에 보게 되는데, '매혹당한 사람들'을 볼 때는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 데도 손님이 없었다. 호기롭게 좌석을 고르고 표를 끊었지만 내심 불안했다. 텅 빈 극장 안에 나 혼자만 있게 되는 건 아닐까. 혼자인 채로 불이 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다행히 그 뒤 몇몇 사람들이 더 들어왔다. 이런 일은 다른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인데, 하여튼 다른 관객이 오기 전까지 혼자 앉아있는 건 좀 불안하다. 안은 어둡고 썰렁하며, 스크린에선 무슨 장면이 나올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극장 문을 들어섰을 때 누군가 먼저 앉아 있다면 정말 반갑고 안심이 된다. 그리고 소수이지만 나랑 같은 취향을 가진 누군가는 구원처럼 반드시 있었다.

 이 시작 전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면 한적한 시간대에 영화를 혼자 보는 것은 썩 괜찮은 일이다.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집중도는 여럿이 볼 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휴대폰 불빛 등에서 자유로워 영화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북적거릴 때 혼자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일종의 '관음'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관음'이란 몰래 훔쳐보거나 엿보는 행위로, 우리는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면면을 '관음'함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오래 전 김근 시인의 '구름 극장에서 만나요'란 시를 읽고 쓴 리뷰의 한 구절. '나는 화면 속의 배우를 바라보고, 배우는 화면 밖의 나를 응시한다. 극장은 내가 아닌 다른 삶을 은밀히 훔쳐보며 쾌감을 느끼는 관음증 환자의 해방구이다. 그래서 극장을 나설 때 우리는 나의 삶에서 반 쯤 빠져나와 타인의 삶으로 반 쯤 발을 들여 놓은 그 경계에서 한동안 두리번거린다.'

 '관음'의 행위는 철저히 혼자이다. 여럿이 영화를 보더라도 우리는 극장 안의 어둠 속에서 서로 격리되어 각자 혼자만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내가 아는 누군가와 같이 영화를 본다면 영화 자체가 아닌 그 누군가에 의해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관람할 때 영화에서 받는 인상은 '순수'하지 않다.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함께 보는 상대에 따라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같은 부가적인 감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순수한 느낌은 오로지 혼자 볼 때,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볼 때 느낄 수 있다.

 뭐, 이렇게 따지고 들지 않더라도 무엇보다 영화 한편을 보려고 약속 잡기가 쉽지 않다. 보고 싶은 영화는 손님이 잘 들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시간대가 애매하게 편성되고, 그마저도 이틀이나 사흘 쯤 뒤엔 슬그머니 내려진다. 그러니 남의 이목 때문에 주저하거나 포기하기보다는 혼자라도 보는 편이 낫겠다. 시간과 좌석을 내 마음대로 선택하는 자유와 호사를 누릴 수 있고, 내 취향에 맞는 영화를 그 자체로 몰입하여 봄으로써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영화 한 편이 오로지 나 혼자 만을 위해 상영되는 것 같은, 홈시어터에 앉은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은 덤이다. 자, 혼자 영화 보기의 묘미를 깨쳤으니 이쯤 되면 나도 이제 혼영족의 고수가 된 건 아닐까? 단, 공포영화는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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