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공장소에 웬 쓰레기를?"
 "예술을 전혀 모르는 말씀!" 

 '서울로 2017년' 개관기념 공공미술로 서울역 광장에 버려진 신발로 조형물을 설치했던 것이 설왕설래, 일파만파로 꼬였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것이었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이것을 바라보는 관점, 특히나 제작자와 주최자 측과 광장을 다니는 일반인들의 시각 차이는 예술과 쓰레기 차이만큼이나 컸다. 여러 매체에서 부추긴 점도 없지 않지만, 결국은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서울역 광장은 평상으로 회복했다. 예술(공공장소에 설치되었다고 모두 예술은 아니지만)이 그렇듯이 충격을 주고 사라지면 흔적도 없는 것 같지만, 우리는 경험이 남는다.

 다시 돌아가서, 방송에 나온 인터뷰에서 일반적인 의견은 "예술이 아니라 쓰레기 같다"는 것이다(방송이나 기사에서 이런 의견만을 취재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고서). 하지만 몇몇 미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는 현대미술을 이해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 의견이라는 주장으로 그 조형물을 옹호했다. 하지만 누가 맞다, 틀렸다 판단하려는 것보다는 왜 이런 논란이 생기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하고,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미술이라는 것이 여전히 일반적인 관념 속에는 무언가 그리거나 돌이나 흙으로 만드는 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관념은 이미 한 세기 전에 사라졌고, 20세기 들어서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작가들은 새로운 제작형식을 선보였다. 그중에서 어떤 이는 이런 것은 '이렇게 생각 한다' 혹은 '그건 틀렸다'라는 개념과 주장을 작품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또, 어려운 철학적 주장도 담아내려는 태도도 탄생한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경향의 작품을 개념미술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신발이라는 소재로 공공프로젝트를 완성시킨 서울로가 보행, 걷기에 대한 주제를 표현한 것이 서울역 앞 조형물인 것이다.


▲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넝마주의 비너스, 1967, 1974, 가변설치


 하지만 일반인은 그것에 동의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미적취미와 취향에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는 소위 개념미술이라는 형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태리 아르테 포베라(가난한 예술) 창시자인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는 비너스 앞에 헌 옷을 쌓아놓고 <넝마주의 비너스>라는 제목을 붙여 발표했다. 아름다운 비너스가 넝마를 한다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비너스라는 작품 앞에 쓰레기를 갖다놓고 전통과 현대가 마주쳐 만드는 부조화에 대한 개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만든 건 하나도 없다. 모두 갖다가 놓은 것이다. 비너스도 헌옷도 쓰레기장에서 가져다 전시장에 쌓아놓은 것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미술작품이 된 것이다. 그것도 개념미술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말이다. 그래도 그의 이 작품은 이태리를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되어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으로 볼 때 여전히 미술이 그리거나, 조각하거나, 만든다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여기에 아름답게 보여주는 것이 미술이라는 200년 전에 생명력이 사라진 관념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제는 자신의 미적 취향이 무엇인지, 살고 있는 삶의 취향이 무엇인지에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