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몇 해 전, '얼굴에 그나마 볼만한 곳이 코이다.'로 시작하는 코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번엔 반대로 얼굴의 약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 약점은 바로 눈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 얼굴에 가장 불만스러운 곳은 눈이다.'라고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고도의 근시에 난시까지 겹쳐져 시력이 아주 나쁘다. 중학교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엔 안경을 쓴 사람이 드문 편이어서 한동안 눈이 네 개라는 뜻인 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지금은 플라스틱 압축렌즈 기술이 발달해서 안경이 훨씬 가벼워졌지만, 십 년 전만해도 유리렌즈를 꼈다. 시력이 안 좋으니 렌즈가 두꺼워서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여름이면 땀에 안경이 밀려 내려오고, 안경이 닿는 코 주위가 헐어 손으로 안경을 받치고 있어야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그 불편함이 별것 아닐 정도로 더 심한 불편함이 따라왔다. 눈이 시리고, 따갑고, 뻑뻑하고, 침침하고, 아무튼 눈을 뜨고 있기보다 감는 게 더 편한 상태가 된 것이다. 좀 피곤하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도 눈이다. 몸이란 우리가 별달리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때, 그러니까 팔이든 다리든 눈코입이든 굳이 '너 거기 있구나.'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은 상태가 건강한 거라는데, 내 눈은 '나 여기 있어요.'하고 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

사정이 이러니 몸이 열 냥이면 눈이 아홉 냥이라느니, 눈은 마음의 창이라느니 하는 말에 주눅이 든다. 눈이 안 좋으니, 그저 아홉 냥의 반의 반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내 몸은 고작  두 냥 정도의 가치 밖에 안 되는 셈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란 말은 또 얼마나 상처를 주는가. 눈을 보면 상대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는 뜻일 터인데, 저녁 모임에서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피곤해 보인다, 벌써 졸리냐 하는 말들을 들으면, 눈이 몽롱하고 흐리멍덩하니 내 마음 상태 역시 그러리라고 사람들이 지레짐작하는 것만 같다. 그러니 별로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 난 김에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 세상이 좀 편안해 질 것 같은 생각조차 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젠 '눈은 마음의 창'이란 말을 좀 달리, 내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물론 눈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통로이다.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연기할 수 있다. 아픈 척, 안 아픈 척, 맛있는 척, 못 들은 척, 혹은 못 본 척 등. 하지만 아무리 '척'을 해도 다른 데는 모르지만 눈만큼은 그것이 '척'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하듯이, 얼굴 가운데 희로애락의 감정이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곳이 눈이다. 

그런데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할 때, 창은 투명하기 때문에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도 있다. 보는 행위는 보여 지는 것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다. 흔히 몸 가는데 마음도 간다고 하여 가까이 있을수록 정이 더 생긴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이 말은 눈 가는 데 마음도 간다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듯하다. 우리는 마음이 가는 곳을 눈으로 보려하고, 눈으로 본 것은 다시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본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들어 '보고', 맛을 '보고', 만져 '보고', 냄새를 맡아 '본다'. 시각은 다른 감각으로 확장되고, 본다는 것은 눈이 아닌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은 서로 교감을 하거나 알아갈 때 '나는 봅니다.'란 말을 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보는 것뿐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고 서로 마음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봅니다.'란 말은 '나는 압니다.'란 말로 치환 될 수 있다.

안목이란 말이 있다. 사물의 가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력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많은 경험과 그것을 내면화 시키는 사유에서 생긴다. 눈썰미나 눈치도 마찬가지다. 일이나 사건의 정황을 바르고, 빠르게 판단하는 능력은 시력이 아닌 심력의 몫이다. 그렇다면 피곤해보이니, 졸려 보이니 하는 말에 그리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웃집 창이 지저분하다고 비난을 하였는데, 알고 보니 지저분한 것은 바로 자기네 창문이었다는 우화도 있는 것처럼 창은 안에서도 맑게 닦아야하기 때문이다.

지난 번 코에 관한 글에서 코란 재복이 아니라 자존감의 상징이라고 한 적이 있다. 눈에 관한 이번 글에선 시력의 외피에 좌우되지 말고 심력의 내공을 쌓아야겠다는 말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아,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생각을 펼쳐보려 했지만 마음에 관한한 유불리를 따질 수 없다. 그저 바르고 맑게 보려 노력할 뿐이다. 맑아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카사블랑카'의 한 대사를 말해보자.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했던 바로 그 말, '그대 눈동자에 건배'라고.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