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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에서도 가끔은 강을 바라볼 때가 있다. 오늘처럼 아침이 밝아오기 전의 강을 바라보게 될 때는 여간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 된다. 물길은 지난밤에 일어났던 것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것의 경계에서 바람마저 고요하다. 이렇게 태화강 하류의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다.

나는 강 하류에 산다. 태화강이 끝나고 바닷물이 섞이는 이곳에 처음으로 둥지를 틀 때는 철거되는 마을에서 달리 갈 곳도 없었을 뿐더러 주된 생활권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파트 앞 동 사이드로 잔잔하게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있음이 좋았다. 비록 좋은 집은 아니어도 베란다에서 차를 마시며 강을 보는 것은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입주 당시의 여유롭고 마냥 좋았던 시간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 밤늦게야 지친 몸으로 돌아왔고 주말은 더욱 바빴다. 강이 보이던 창에는 항상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아주 긴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지나간 시간만큼 이제는 조금의 여유도 생겼다. 집을 새로 단장하고 창가에 나무 식탁을 놓았다. 식탁에 앉아 강을 바라보며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면서 강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도 찻잔에 녹아들었다. 식탁을 옮긴 것뿐인데도 우리 가족은 나란히 앉아서 강을 보거나 마주보며 대화하는 시간도 생겼다.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작은 변화가 가져온 것들은 나에게 무한하다.

폭우로 태화강이 범람하여 쏟아진 토사에 떠내려가는 부유물들을 바라보면서 상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 현상들을 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느 때고 상류에 살아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좋은 동네이거나 수준 높은 스포츠로 일반적으로 돈이 있는 사람들이 들고 싶은 모임 같은 범주에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백세시대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강의 하류와 강의 상류는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일단 강의 넓이와 유속이 다르다. 상류의 몇몇 좁은 샛강에서 빠르게 흘러내린 강물들이 하류로 오면서 강의 폭이 좁아지고 유속도 느리다. 상류에서 주변의 것들을 스치듯 흘러내려온 물이 하류에서는 마치 강물이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속에서 서로 화합하는 찰나들이다. 그 순간부터 더 낮게 흘러내린 것들이 강바닥을 파고든다. 더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위해서다.

해가 붉게 물든 강물 위로 수면을 끝낸 물고기들이 빛을 향해 높이 뛰어 오른다. 어느 날은 청둥오리까지 노닐고 있는 순간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음도 뿌듯하다. 밥을 먹다가도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차를 마시면서 마음은 슬며시 강을 더듬는다. 가끔은 흘러내리는 물길을 거슬러 상류로 오르는 고기 떼들도 있다. 본성 같은 것들이 발동하는 순간들이다. 그러나 대부분 강 하류에서 무리 짓고 모여 있다. 상류의 맑은 물에는 많은 고기가 모이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사람이 사는 것도 그와 같지 않을까싶다.

볕이 억새밭에 머물고 있다. 보는 눈이 따뜻하게 내 시린 등까지 데우는 듯하다. 가을이 되면 억새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만장처럼 모여든다. 사람들이 떠나고 난 강기슭에도 해는 골고루 퍼져서 사위어가는 억새들을 데워주고 있다. 강과 마주하고 있으면 잔잔하고 고요한 물길이 느껴지고 바람 부는 날에 물결이 너울지면 남은 억새도 볕 바라기를 하며 등을 눕힌다. 그러나 한결같은 물속의 것들이 궁금할 때도 있다.

마음과 몸에 고요함이 남아 있는가 하면  너울처럼 흔들릴 때가 있다. 강한 바람에 물결치는 강물도 다시 고요해지는 것 같아서 삶이나 자연을 더 생동감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사계절의 변화무쌍한 강 하류에 사는 것은 오히려 상류에서 갖지 못하는 것을 누리는 복된 삶인 것 같다. 청둥오리떼가 지나가며 강물에 길을 낸다. 무한한 강물의 물리처럼 내 스스로 길을 내며 다시 한 번 더 설레는 걸음을 내 걸어보고 싶다.


해를 머금은 억새밭이 수런거리는 시간에 강은 더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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