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창섭 미술평론가

깜빡, 깜빡 이말 뜻을 알면 세대가 꽤 올라간다. '형광등'해도 이해한다면 나이가 꽤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래 전에 형광등 불빛아래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추억이 있는 것으로 작품을 만들어 라이트 아트(light art)의 창시자라고 불리고, 미니멀리즘 작가로 소개되기도 하는 사람이 '댄 플레빈'이다.


그는 1933년에 태어나 젊었을 때 잠깐 추상표현주의 풍의 작품을 하다가 1963년 형광등을 이용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울산신문 5월 16일 13면 게재)는 98년까지 무려 39개를 시리즈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이름에는 현대미술가 이름이 붙은 것이 많다. 브랑쿠시, 바넷 뉴만, 마크 로스코, 피에트 몬드리안 등등. 그는 몇 가지 색을 내는 형광등(우리는 집에서 쓰던 흰색과 정육점에서 쓰던 붉은 색 형광등 2가지만 안다)과 길이가 다른 형광등으로 풍성한 시각기호를 만들어냈다. 사실 원형으로 된 긴 막대 형태인 형광등이 무슨 예술작품이 되나하고 의아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작품이 설치된 공간에 들어가 보면 이런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진부한 형태와 천박한 색 그리고 그저 그런 구성으로 예술이라는 망토를 뒤집어쓰려는 되지도 않는 수많은 작품보다 감동은 천백 배 크다. 손으로 이리저리 만들어 작위적이 아니라, 완벽히 100% 산업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댄 플레빈 作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 형광등, 243.8×77.5×12.7cm, 1964,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소장
댄 플레빈 作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 형광등, 243.8×77.5×12.7cm, 1964,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소장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와 예술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뉴욕은 뉴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모든 예술가의 목표가 되었을 정도로 추상표현주의부터 팝아트, 옵아트, 미니멀리즘, 대지미술 등등 많은 현대미술사조와 유명작가들을 배출해냈다. 하지만 뉴욕을 더 뉴욕처럼 만든 것은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만 무조건 따라하지 않는 예술 후원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크 로스코, 제스퍼 존스 또 로버트 라우센버그가 아무리 좋은 작가라고 남들이 평해도 자신의 미적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또 다른 예술을 찾았고 그들을 후원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재료로 만든 실험적인 미술작품을 할 수 있는 작가들에게는 최소한의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시류를 거스르는 가난한 댄 플레빈과 도날드 저드 등과 같은 작가는 1963년 <신작:1부>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수 있었다. 이후로도 많은 미니멀리즘 작가를 후원해서 이들이 성장하도록 도운 화랑은 '그린 갤러리'이다. 비록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들의 작품이 말하는 의미를 알아준 화상 때문에 이들 작가는 생존할 수 있었다. 3년 뒤 '쥬이시 미술관'에서 열린 미니멀리즘 전시는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물질이 넘치고 복잡한 사회로 발전할수록 미니멀리즘은 더 큰 관심을 받았다. 미술뿐만 아니라 패션, 출판, 저널리즘 분야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고, 21세기 현재 우리나라도 때 아닌 생활미니멀리즘 바람이 불고 있다. 

뉴욕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비콘이라는 작은 도시에 '디아비콘'이라는 미술관이 있다. 과자포장지를 만들던 공장을 개조해서 실험적인 작품들만 수집하고, 작품에 적합하게 전시장을 만든 미술관이다. 7천 평이 넘치는 전시장에 전시하는 작가는 고작 15명 내외다. 작품이 바뀌면 당연히 전시공간도 바꿀 만큼 자신들만의 미적취향을 드러내는 미술관이지만, 개관한지 10년 만에 세계적인 미술관이 되었다.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작가들이 제작하는 작품을 후원하고 수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그들이 부러운 이유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