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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수십 년 만에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자, 도시 모습도 서서히 변화한다. 1851년 런던만국박람회 때 세워진 '수정궁'은 철과 유리를 사용해 길이 563미터, 폭 124미터에 이르는 현대식 건물이었다. 산업, 공장, 생산과 같은 역동적인 분위기는 철학과 문학, 예술문화를 변화시켜 다가올 천년의 유전자를 탄생시켰다. 

건축과 토목은 도시가 품은 분위기를 드러내는 중요한 산업부분이면서 문화예술의 훌륭한 동업자이다. 크기와 넓이에 대한 한계를 지닌 건물재료인 석재와 벽돌에서 공학기술과 결합된 철과 유리로 대체된 건물은 크기와 구조 대한 한계영역을 점점 넓힐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한계확장에 대한 욕망은 산업과 기술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이런 발전은 19세기와 완연히 다른 모습을 한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산업과 기술 그리고 자본은 예술작품에 있어서 엄청난 모험심을 발휘하게 했다. 영국을 이겨보자는 욕심에 혁명 100주년인 1889년에 프랑스가 세운 높이 310미터짜리 '에펠탑'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 본보기이다. 철로 이렇게 높이 쌓아올려야 하는 이유를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못했지만 결국 에펠탑은 철로 만든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였다. 산업도 공학도 철도 모두 예술의 재료가 된 것이다. 이것이 20세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다시 19세기로 돌아가서,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시기인 1881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난 레제는 건축사무소에서 견습생을 하다가 1903년 파리로 미술유학을 간다.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미술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찾다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에 영향을 받는다. 19세기와 완벽히 다른 형식과 이야기를 시작한 입체파가 온 유럽에 위력을 떨쳤으니 젊은 레제가 예술의 최전선에 뛰어든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페르낭 레제作' 건설자들' 캔버스에 유채, 300×228cm, 1950, 페르낭 레제 국립미술관 소장.
페르낭 레제作' 건설자들' 캔버스에 유채, 300×228cm, 1950, 페르낭 레제 국립미술관 소장.

그동안 신의 이야기와 역사기록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과 몸, 인간들의 생활을 묘사하던 미술이 이제는 세상을 분석, 분해하고 공장과 굴뚝 그리고 인간들의 욕망과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0년대 프랑스 파리는 예술의 최첨단을 걷고 있었고 레제도 여기에 동참한 것이다. 한창 예술세계를 꽃피우려고 하던 찰나 그의 인생에서 최대 위기이며 경험이 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분석적이고 구조적인 입체파에 경도되었던 그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부분에 눈을 뜨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산업혁명으로 발전한 기술은 살상무기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레제는 파이프와 기둥과 같은 것으로 도시와 산업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화면 전체에 배치된 둥근 파이프와 철 구조물 때문에 그를 '기계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 입체파에서 기계주의 그리고 산업과 노동자 그리고 이들의 평화로운 삶을 묘사한 그는 진정으로 20세기 산업사회를 상징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점점 가볍고 밝은 색조를 사용하고 물체들은 점점 단순하게 변화되는 그의 작품은 당시 유럽과 미국의 사회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이 "이게 무슨 기계주의냐?"고 할 수 있다. 레제만큼 산업발전으로 형성되고 변화된 도시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을 잘 드러낸 작가는 드물다. 내가 살고 있는 시간과 지역 그리고 그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을 바라보려는 눈이 없다면 결코 이런 작품은 만들 수 없다.    

2000년하고도 18년이 되는 새해, 페르낭 레제처럼 우리시대를 반영한 작품이 많이 출현되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울고 웃는 이유를 찾을 수 있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어떤 사람이 보아도 21세기 살았던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남길 수 있는 작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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