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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날씨가 바짝 추워졌다. 울산 기온이 영하 10도라니. 추위는 미세먼지까지 얼려버리는 걸까? 하늘에 손을 대면 투명한 코발트빛 허공이 와장창 쏟아질 것 같다. 사선으로 치고 들어오는 햇살은 또 얼마나 빛 부신지 난시 심한 내 눈은 실눈을 뜨거나 한쪽 눈을 감고도 눈물을 내비친다. 무더운 여름날 문득 그리워지기도 했던 날씨지만 마냥 반가워 할 수만은 없다. 햇살을 외면해야 하는 눈을 가진 탓.

창밖에는 쨍한 하늘이 있고, 선그라스 착용에도 불구하고 눈은 부시고, 라디오에선 백석 시인의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시가 흘러나오는 겨울 한낮, 백석의 시를 따라가는 길 위에서 외면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하 하략) -백석의 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중-

 

애써 외면하고 나면
그뒤에 오는 후회와 자책,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자괴감으로
한동안 우울해진다


이 시에 내가 더 끌리는 것은 '외면'의 내용이 아니라 외면의 상황 때문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외면과 내가 지금 생각하는 외면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외면당한 아픔을 겪어본 사람은 외면해야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이 들어 좋은 것 중 하나는 외면하고 한 발 물러서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무언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앞서 의견이 다른 이들과 충돌이 일었다. 가끔 뜻을 같이 했던 이들이 적당히 물러설 때도 비겁한 퇴보라 생각해서 끝내 버티었고, 의협심 내지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우쭐거렸다. 앞뒤 분간도 못하고 나서는 나를 부추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영리한 사람들이 '잘했어' 어깨 두드리는 걸 진심으로 알고 목청을 높였으니, 그 어리석음은 가히 목불인견이었을 것이다. 외면해야 할 곳에 외면하지 못 한 부작용 탓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외면해야 할 곳과 외면하지 말아야 할 곳은 헛갈린다. 더구나 엇갈리게 움직이는 나의 행위는 자주 후회감이다.
종일 켜놓고 사는 TV에서 세계 곳곳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도와달라는 광고가 그렇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는데 오불관 하고 많은 부분 외면하기는 해도, 마음 한 구석은 늘 찜찜하고 불편하다.

가끔 동네시장에 나갔다가 온몸을 끌고 구걸하는 아저씨들을 만나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차디찬 바닥에서 종일 기어야 채워지는 허기라면…. 그 장애와 처지에 마음이 저리다. 그렇다고 시장 볼 돈을 다 털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잔돈이 없으면 외면하고 비켜올 수밖에 없다. 다행히 돌아올 때 다시 만나 잔돈 한 잎 놓고 오면 마음이 편하다. 

때론 누군가 한 번쯤은 나서주어야 할 때도 나는 대부분 외면한다. 이를테면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의 흡연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나 버스에서 노약자나 임산부가 앞에 섰는데도 외면하는 청년,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욕설 하거나 폭행하는 아저씨, 어린 아가가 물건을 훼손하거나 난리를 쳐도 바라보기만 하는 젊은 엄마 등의 언짢은 상황 앞에서도 나는 외면하려 애쓰는 편이다. 공연히 나섰다 망신당하고 싶지 않은 탓이기도 하고,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소위 '너나 잘 하세요' 하는 분위기에 편승할 수밖에 없지만,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살면서 외면이 필요할 때는 있다. 끝도 없이 일어나는 욕망. 알고 싶고, 갖고 싶고, 먹고 싶고, 사고 싶고, 가고 싶은 것을 외면해야 할 때. 순간에는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있지만, 들끓는 순간만 잘 넘기면 충동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역시 세월이다.

이 모든 것보다 힘든 것은 나 자신의 문제를 외면할 때 마음 속 갈등은 심  하다. 나이와 병을 핑계 삼아 시를 외면하고, 공부를 외면하고, 살림살이를 외면하는 나를 내가 외면하고 나면 그 뒤에 오는 후회와 자책, 그것을 넘어선 자괴감으로 한동안 우울해진다.

세상에 적당이라는 도구가 있어, 요만큼은 외면하고, 요만큼은 외면하지 말기를 알려주는 도구가 있다면 이렇게 갈등하지 않아도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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