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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영국에 문화예술가를 쓱 보냈다. 19세기 후반에 가장 진전된 산업 국가였던 영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이를 질시한 독일은 1896년 건축가인 '헤르만 무테지우스'를 주영 독일대사관 문화담당관으로 파견한 것이다. 요새말로 산업스파이를 보낸 것이다. 똑똑한 건축가였던 그는 곧 이유를 알아냈고, 두툼한 보고서를 본국에 보냈다. 몇 년 뒤 이 보고서는 '영국의 집'(1904)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윌리암 모리스作, 클레이 텍스타일 디자인, 1884 경.
윌리암 모리스作, 클레이 텍스타일 디자인, 1884 경.

영국은 '윌리암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Art & Craft)으로 산업물품과 산업계에 예술적인 감각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미술작품과 공예품이 좋은 교육재료라는 것을 여러 영국의 선각자들이 알고 있었고, 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알버트 뮤지엄(A&V Museum)을 개관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혁명 초기부터 이런 기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생산량 증가와 저렴한 노동력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품질과 형태는 형편없었다. 값은 싸졌지만 품질은 점점 떨어져 오히려 사용자 불평과 불만이 높아졌다. 한편, 산업의 발전은 커다란 부를 쌓은 부류가 등장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되었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도 등장했다. 이런 정치사회적 변화는 사회적 위기를 불러일으켜, 사회체제를 변혁시킨 러시아 혁명, 미국의 남북전쟁, 프랑스 대혁명도 이즈음에 일어났다. 모두 사회체계의 변화가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문 혹은 문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의식이 신과 역사보다 더 관심을 받으면서 우리들 생활을 직시하려는 사실주의(Realism)가 이 시기에 등장한다. 자신과 대상을 구분해서 인식하고 사회와 환경에 대해 허구가 아닌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려 한 것이다. 1850년대 유럽은 그야말로 새로운 기운과 옛것의 기운이 부딪쳐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부분에서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빈민층 문제와 도시환경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하게 등장하면서 사회운동가이며 사상가였던 '존 러스킨'은 예술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눈으로 보면 러스킨의 주장은 매우 낭만적이지만, 그때에는 유럽 최고의 지성인이 주장하는 것이게 많은 지성인과 젊은이들이 공감했다. 그중에 한사람이었던 모리스는 중세의 장인정신과 미술의 조형적인 요소가 들어간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신-개념의 회사를 차린다. 1861년 친구와 '모리스-마샬-포크너'를 설립한 것이다. 이 회사는 가구, 벽지 스테인드글라스 등 실내장식에 필요한 가구와 물품을 만들었다. 이는 디자인의 효시가 되었고 중세의 기술을 되살려 공예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 되었다. 이런 움직임이 '미술공예'운동을 불러일으켰고, 영국의 산업기술과 제품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모리스가 디자인한 가구나 벽지는 지금 눈으로 보면 과도한 장식과 색의 사용으로 진부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영국에 산업스파이로 파견되었던 무테지우는 귀국해 독일판 미술공예운동의 하나로 '독일공작연맹'을 만들었다. 모리스의 정신을 받아들인 독일 전역에는 공예작업장이 등장하게 되었고, 독일공장연맹이 그 기폭제가 된 것이다. 독일의 산업화에 대한 목표를 달성하고 대중의 미적 감각을 키우는데 힘을 기울였던 이들의 노력은 곧 효과가 나타났다. 또 현대디자인의 체계적인 교육과 현대미술의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 '바우하우스'도 이런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일의 이 연맹에는 당시 영향력 있는 예술가와 사업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우리는 윌리암 모리스가 남긴 작품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끼친 생활문화를 생각하면, 예술이 적극적 사회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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