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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교수 중에 한 사람인 파울 클레는 1922년, 마흔셋에 '세네치오'(Senecio)를 그렸다. 자화상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 붙은 제목은 '나이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20세기 초라면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만, 그림을 들여다보면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꽤나 자유롭고 발랄한 색이 어린아이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둠보다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즐거움과 선함을 보려는 의지가 있는 얼굴은 중년의 얼굴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인 것처럼 보인다. 음악을 좋아하고 강의와 토론을 즐겨했던 클레의 일생에 비추어보면 이런 해석에 더 수긍이 간다.

 

파울 클레, 세네치오, 캔버스에 유채, 40.3×37.4cm, 1922, 스위스 바젤 미술관 소장.
파울 클레, 세네치오, 캔버스에 유채, 40.3×37.4cm, 1922, 스위스 바젤 미술관 소장.

거의 정사각형인 캔버스에 둥그런 얼굴에 빨간 눈동자와 오른쪽 검은 눈썹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화면전체 색조는 따듯한 느낌이 드는 붉은색이고, 얼굴에는 핑크색을 칠해 순진한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생김새에 대한 표현과 코와 입에 대한 묘사는 과감히 생략했다. 배경은 많은 시간을 들여 칠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하게 아니라 마음가는대로 선선히 칠했다. 동일한 계통의 색을 조금씩 변형해서 칠한 캔버스 전체에는 부드러운 리듬이 흐른다. 빠르게나 느리지도 않고 적당히 즐겁고, 한편으로는 약간 무거운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들 수 있는 박자로 반복하고 있다.

파울 클레가 막 바우하우스에 교사로 부임한 때에 이 그림을 그렸다. 어릴 때 음악, 특히 바이올린에 심취했던 그는 음악적인 요소를 회화적 요소와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당시 국제적인 예술의 흐름은 사물을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역할을 벗어나 인간 내면의 상태를 표현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여러 분야에서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러시아의 구성주의와 키네틱 아트,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의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 그리고 철과 유리와 같은 산업물품을 작품재료로 사용하려는 제작태도가 왕성하게 일어나 새로운 형식의 회화가 빠르게 등장하던 시기였다.

1912년 칸딘스키와 결성한 '청기사파'와 뮌헨의 '신분리파' 등과 관계를 맺은 클레는 추상회화와 색에 대하여 남다른 태도를 보이면서 세네치오와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실험적이면서도 색에 대한 깊은 연구를 눈여겨보던 바우하우스의 교장 그로피우스는 클레를 1922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교사로 초빙한다. 그가 맡은 과목은 회화와 색채, 판화였는데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구성적인 성격이 강했다. 사각형과 색 그리고 면을 사용한 구성형식을 엄밀하게 실험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바우하우스가 폐교되었고, 클레는 1937년에 102점을 몰수당했다. 현대미술사적으로 매우 불행한 전시였던 퇴폐미술전에 17점이나 전시되어 대표적인 퇴폐예술가로 낙인찍히면서 스위스로 돌아갔다.

클레는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와 자신의 작품세계를 더욱 확장시켜가면서 한편으로는 더욱 어린이가 그린 그림 같은 화풍으로 변화해갔다. 20세기 초, 국제적인 정치와 경제는 어둡고 힘든 시기였지만 문화예술은 다양함에 있어서 어느 시기보다 더 풍성했다. 예술은 언제나 고정관습에 과감히 맞서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을 반추하도록 항상 경계심을 부여한다.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사람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고, 덕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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