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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사월이 왔다. 따듯하다고 얇게 입은 옷이 원망스러운 4월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토머스 엘리엇이 살았던 미국의 초원도 생명을 틔워내기 위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기에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 하여튼 4월의 어느 날에는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이 어울린다.

키리코가 1910년대에 그린 그림은 한마디로 수상한 느낌이 든다. 햇빛이 있는 한낮인 데 짙지 않은 그림자 속에는 우울함이 가득하다. 가늠하기 힘든 크기의 비례를 가진 그리스풍 건물로 둘러싸인 황토색 광장은 공허한 아름다움에 젖어있다. 황토색 광장을 가로지르는 알 수 없는 사람의 그림자도 뜨겁게 외롭다. 30년대에 갑자기, 그의 그림은 이해할 수 없는 고전주의 화풍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많은 콜렉터들이 10년대 키리코의 작품을 요구하자 스스로 작품제작 연도를 슬쩍 바꾸는 일을 벌였다. 이 일은 키리코 작가 인생과 미술역사와 미술시장에 혼란을 남기며 긴 시간 동안 법정시비에 휘말린다. 끝내 그는 자신의 작품을 부정하고 이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다. 

이태리가 도시국가에서 1870년에 통일되었지만, 산업혁명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실현하고 있던 영국과 독일에 한참 뒤져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전국이 되었지만,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고 무솔리니에 의해 등장한 파시즘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태리를 패전국으로 만들었다. 이런 현대사 속에서도 이태리는 현대문화예술은 다른 유럽국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조르조 데 키리코, 무한함에 대한 향수, 캔버스에 유채, 135.2×64.8cm, 1911, 뉴욕근대미술관(MoMa) 소장
조르조 데 키리코, 무한함에 대한 향수, 캔버스에 유채, 135.2×64.8cm, 1911, 뉴욕근대미술관(MoMa) 소장

1909년 마리네티가 미래파 선언을 했고, 10년에는 칼라, 보치오니, 발라 등이 미래파운동을 선언했다. 비록 파시즘에 묻혀 버리고 말았지만. 이 시기 젊은 문화예술가들은 나라를 혁신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리스에서 출생한 키리코도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이태리 현대미술 작가이다.

그는 아테네와 피렌체에서 미술공부를 했고 뮌헨에서도 공부했다. 1911년부터 15년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피카소의 입체파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독일의 철학자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책에 더 많은 감명을 받았다. 혼돈에서 오는 비애, 비애에서 오는 극적인 아름다움, 미술이 질서와 균형을 추구하던 아름다움 대신에, 이런 것들을 추구했다. 키리코가 어렸을 때 살던 고향 그리스 마을에서 얻었던 영감을 떠올려 누구도 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무한함에 대한 향수'(1911)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은 좁고 긴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이다.

한쪽 면이 빛을 받아 밝은 탑의 지붕은 붉게 빛난다. 짧은 깃대에 달린 다섯 개의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좁고 높은 탑이 서있는 광장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는 밀담을 나누는지 움직임이 없다. 오른쪽 앞에는 커다란 아치가 있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얼마나 큰 건물인지 그림자가 광장의 절반이나 어둡게 하고 있다. 그 어두운 그림자 속에 우울과 긴장이 깃들도록 세심하게 키리코는 배려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불안을 이끌어 내려는 듯 서서히 물감을 메우고 있다. 아무리 봐도 즐거운 그림은 아니다.

요즘에 잔인한 사월은 거의 사라졌다. 마음이 따듯해 그런 거라면 좋으련만,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이제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이 어울리는 다른 날씨를 찾아야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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