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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홀연 나타나서 하늘을 곧게 가로지르며 나아가다 뒷부분부터 솜털이 풀리듯 풀어지며 마침내 사라져 가는 비행운. 비행운은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나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는 배가 그러하듯, 우리를 어떤 머나먼 곳, 미지의 낯선 곳으로 이끄는 듯하다. 기차나 배는 기적 소리와 뱃고동 소리로 출행을 알리지만, 비행기는 넓은 하늘을 지나며 어떤 출행의 소리를 낼까. 그건 아득한 허공의 일이어서 우리로선 알 길이 없으니, 소리 대신 머플러처럼 기다란 비행운을 그 흔적으로 남기는 것일까.

기차든, 배든, 비행기든 모든 탈것,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움직여 가는 것들을 보면 무언가 설레고, 아련하고, 두근거린다. 아마 아득한 미지의 곳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아이 머리를 잡고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을 '서울 구경'이라고 했다. "서울 구우경" 하면서 들어 올려 지면 그게 재미있어서 자꾸 해달라고 보챘다. 당시엔 서울 한 번 가는 게 퍽이나 대단한 일이었고 거의 평생의 소원이었으니, 새롭고 먼 곳에 대한 동경은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인 듯하다. 나는 오영수의 단편 '요람기'를 좋아하는데, 그 소설의 마지막 부분, "언제나 가보고 싶으면서도 가보지 못하는 산과 강과 마을, 어쩌면 무지개가 선다는 늪, 이빨 없는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고 산다는 산속, 집채보다도 더 큰 고래가 헤어 다닌다는 바다, 별똥이 떨어지는 어디쯤…."을 읽을 때면 늘 가슴이 먹먹하다. 젊은 날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 얼마나 안달이 나는 시기인가. 그때의 우수와 동경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엔 월남에 다녀온 이가 있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할 때라 외국이라면 아버지가 왜정 때 일본에 다녀온 것과 동네 아저씨가 만주에서 고생한 이야기가 전부였는데, 젊은 오빠(?)의 월남 이야기는 색다른 흥미와 기대감을 주었다. 일본이나 만주는 그저 말뿐이지만 월남 이야기는 그림엽서까지 곁들여져 우리의 상상을 더욱 부추겼다. 초록 논 위에 엎드린 삿갓을 쓴 농부들, 하얀 월남 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아가씨들,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원,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베트콩과 국군 이야기….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고, 어린 나에게 당시 월남은 그저 미지의 이국이었다. 이 먼 나라를 오갈 수 있게 하는 비행기란 얼마나 대단한 것이지. 나도 커서 비행기란 것을 타 볼 수 있을는지 하는 생각. 그땐 운행 횟수도 많지 않고, 동네가 공항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쩌다 하늘에 나타나는 비행운을 보면 그것이 희미하게 풀리면서 영영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젖히고 바라보곤 했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은 그 이후 전혜린의 수필을 통해 절정에 달했는데, 독일에서의 유학 생활이 바탕이 된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으며 전혜린이 거닐었던 슈바벤 거리를 얼마나 열심히 그려보고, 간절히 가고 싶어 했는지, 나중엔 헤르만 헤세의 고향이 슈바벤이란 사실을 알고 헤세의 작품을 탐식하듯 읽기도 했다. 그리고 생텍쥐페리. 내가 생텍쥐페리를 좋아한 것은 『야간비행』 때문이다. "밤은 어두운 연기처럼 피어올라 벌써 계곡을 메웠다. 계곡과 평야는 이제 구별이 되지 않았다. 마을은 벌써 불을 밝혀 별자리처럼 반짝임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도 손가락을 튕겨 날개 등을 깜빡이며 마을에 화답했다. 등대가 바다를 향해 불을 밝히듯 집들이 저마다 광대한 밤을 향해 불을 밝히자 대지는 반짝이는 호출 불빛이 신호가 점점이 박힌 듯 펼쳐졌다." 조감도처럼 펼쳐지는 이런 묘사는 얼마나 상상을 자극하는가. 나는 비행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듯 불빛이 깜빡거리는 밤의 풍경을 눈앞에 그려보곤 했다.

내가 비행기를 처음 타게 된 것은 태국을 가는 첫 해외여행 때였다. 그동안의 기대와 달리, 의외로 매우 담담한 기분이었다. 이미 해외여행이 자유화 된 지 오래여서 월남뿐 아니라 호주나 남미를 다녀온 소식도 심심찮게 듣는 터에 늦게 해외여행에 편승한 탓도 있겠지만, '요람기'의 맨 마지막처럼 나도 어느새 "희비애환(喜悲哀歡)과 이비(理非)를 아는 나이"를 먹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륙을 한 뒤 비행기가 눈부신 구름 위를 날고 있을 때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늘은 씻은 듯이 파랗고 구름은 운해(雲海)라는 표현에 걸맞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밤이어서 창밖으론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거렸다. 낯선 별들을 보며 저게 북반구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남십자성인가 하며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야간비행』의 주인공 리비에르는 "모험의 신성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참뜻을 왜곡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찬미하는 사람을 두려워했지만, 그러나 이럴  때, 그러니까 오로지 칠흑처럼 펼쳐진 어둠 속에서 별들만 징검다리처럼 흩어져 있을 때, 별들을 벗 삼아 광막한 하늘을 날고 있는 고독한 비행사들을 어찌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즘은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하늘에 펼쳐진 도시란 뜻으로 '시티 오브 스카이'란 말까지 나왔지만, 그래도 비행기를 조종하는 비행사는 여전히 대단해 보이고, 한일자를 그으며 사라지는 비행운을 보면 지금도 여행 가방을 챙겨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그런데 요즘 대한항공의 갑질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땅콩 회항 사건도 그렇지만, 욕설과 막말 파문은 도가 지나쳐서 그동안 움츠려있던 직원들도 나도 당했다며 또 다른 의미의 '미투'를 외치고 있다. 우리나라 재벌 그룹의 안하무인적 행태는 잊을 만하면 터지는 단골 뉴스이지만, 대한항공의 갑질이 유독 화가 나는 것은 그곳이 비행을 담당하는 항공회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비행운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듯, 지금도 누군가는 비행기를 보고 아득히 먼 곳에 대한 기대로 가슴을 두근거릴 것이다. 비행기 운항을 책임지는 오너 일가의 일탈이, 그 꿈과 그리움에 찬물을 끼얹는 듯해서 더욱 씁쓸하고 못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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