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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그러니까 2017년 5월 6일은 사할린에서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전날 사할린에 살고 계신 한인 어르신들을 모시고 어버이날 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던 터라, 계획한 오전 일정을 취소하고 한인문화센터로 일찌감치 달려갔다.

사할린 각지에서 오신 '어버이'들이 삼삼오오 행사장으로 집결하셨다. 행사는 거의 러시아말로 진행되었다. 사할린동포 2세인 사할린주한인회 박순옥 회장은 이날도 분주했고, 바쁜 와중에 어제 미장원에 간다던 사무국장의 올림머리는 잔뜩 힘이 들어 있었다. 인사말을 맡은 김주환 사할린한국교육원장은 어버이날 노래까지 불렀다.

이날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한복을 차려 입은 사할린동포 2세로 보이는 장년의 '어버이'들이 1세대 노년의 '어버이'들에게 감사의 시를 낭독하는 시간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절대 몸이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러시아식 강세가 섞인 우리말로 한 사람씩 외줄타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낭독해 나갔다. 아뿔싸, 결국 누군가에 의해 말문이 닫혔다. 길어야 두 줄 되는 문장인데 그들에게 우리말은 그만큼 어렵고 낯선 언어였던 것이다. 강당 가득했던 어색함은 선배 어버이들의 박수로 사라졌다. 2세대의 우리말이 이 정도이니 3세, 4세는 어떻겠는가.

사할린(Sakhalin).
나는 이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운명이 곧 한민족 이산의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1905년 러일전쟁 후 일본은 북위 50° 기준으로 사할린 섬 남쪽 땅을 얻었다. 조국을 잃은 우리네 선조들도 먼 동토의 땅까지 오게 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탄광 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을 떠나 온 것이 바로 1차 이산의 역사이리라. 태평양전쟁 말기 사할린 동포들 중 일부는 일본 남부 큐슈나 야마구치 탄광으로 배치되는 이중징용의 피해자가 되었다. 사할린 땅에 남은 가족과 생이별해야 하는 2차 이산의 역사다. 사할린 북쪽 러시아 지배하에 있던 동포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패전 후 일본은 조선인들을 사할린 땅에 내버린 채 떠났다. 사할린 섬 최남단에 위치한 코르사코프 항구에서 동포들은 그들을 데리고 갈 귀국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망향비 비문에 적힌 대로 그렇게 굶고 얼어 죽고 미쳐갔다.

1990년대 뒤늦게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 귀국이 시작되었지만 그 대상자는 1945년 8월 15일 이전 이주 또는 출생으로 한정되었다. 한국으로 영주 귀국한 부모와 사할린에 남은 자식간 또 다른 3차 이산의 역사가 생겼다. 여행 중 브이코프 탄광 마을에서 만났던 손씨 성을 가진 동포 2세는 1945년 8월 15일을 지나 사할린에서 태어나 영주귀국을 하지 못했다며 어떻게든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많은 사할린동포들에게 있어 광복은 또 다른 이산의 역사인 셈이다.

지난 4월 27일 그렇게 낡고 높고 거칠고 위험했던 군사분계선이 말 한 마디, 한 발자국으로 쉽게 오갈 수 있음을 모두가 지켜봤다. 한시라도 빨리 남북 이산가족이 혈육을 만나고 사할린을 비롯한 전세계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구심이 우리 땅이어야 하리라.
소확행(小確幸). 자유롭게 만나 뵙고 전화할 수 있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소소한 듯 확실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오늘 저녁에는 어머니께 감사의 전화라도 드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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