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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시장에서 작은 화분 하나를 사 왔다. 봄을 알린다고 올라오는 앙증맞은 꽃송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에 단비를 만난 듯 기운이 살아난다. 휑한 거실에 나비처럼 사뿐히 날아든 진홍빛 시클라멘 하나가 집안 분위기까지 환하게 바꾸어 놓는다.

화사한 분위기도 잠시, 오종종 고개를 내밀던 꽃대가 며칠 사이에 시들어가고 있다. 행여 새로 이사 온 집이 불편해서 그런가, 물을 주고 볕이 잘 드는 책상 위에다 자리를 옮겨도 소용없다. 무엇에 허기가 졌는지 정성을 들일수록 점점 생기를 잃어간다. 아무래도 오래 곁에 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예전부터 꽃을 잘 사다 날랐다. 대부분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시장에 찬거리를 사러 갔다가 꽃만 사 들고 와서 남편에게 잔소리를 들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꽃의 특성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좋아한답시고 이거 저것 소유욕만 앞섰다.

사다 놓은 화초들은 한참을 그런대로 살아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나씩 말라서 죽고, 얼어서 죽고, 썩어서 죽어 나갔다. 욕심만 앞섰을 뿐 정작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는 모르면서 무턱대고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 탈이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쉽게 마음이 빼앗기는 데는 친정아버지의 영향이 많았다. 친정집에서는 사계절 꽃을 볼 수 있었다. 여름은 물론이고 한겨울에도 은은한 난 향기가 방안 가득했다.
소유욕이 앞섰던 나는 애지중지 키워 놓은 꽃을 노리는 염탐꾼이었다. 꽃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버지는 선뜻 가져가서 키워보라고 권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계셨다.

아버지 손은 약손이었다. 죽어가는 화분도 아버지 손길이 닿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기를 찾았다. 부럽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아버지만의 비결이 숨어 있었다. 기분 내킬 때마다 물이나 주던 나와는 다르게 한 잎 한 잎 꽃들을 대하는 손길에 정성이 묻어났다. 지나친 태양은 가려주고, 때가 되면 거름을 주고, 기온이 내려가면 방으로 들여놓는 수고는 당연했다. 덩치가 커진 화초를 다른 화분에 옮겨 심어주기까지 세세한 손길로 보살폈다. 그런 모습을 닮아가고 싶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식물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성격 탓인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부터 탐스러운 꽃을 꺾는 버릇이 있었다. 한 손에 오목하게 차도록 굵어진 달리아 꽃을 보면 모가지를 따서 제기차기도 하고 콩 주머니 놀이도 했다. 꽃들은 금방 망가져 버렸고 그럴 때마다 또 다른 꽃송이에 손을 댔다. 한참을 정신없이 놀다 보면 온 마당에 꽃가루가 흩어졌다.

꽃을 괴롭히는 일은 어른이 되어서도 버리지 못했다. 여러 해 전, 꽃꽂이를 배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화초를 키우는 데 자신이 없었던 나로서는 반가운 놀이었다. 처음 몇 달간은 겨울에도 원 없이 꽃을 볼 수 있는 취미에 흠뻑 빠졌다.

해가 거듭되어도 꽃들과 교감을 나누지 못했다. 사랑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다 분질러 앉히면 되는 줄로만 알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 손으로 디자인한 꽃들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물론 집안이 밝아지고 덤으로 따라오는 생동감은 있었지만, 흙에다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할 화초들을 댕강댕강 모가지를 잘라서 인위적으로 아름다움을 꾸미려는 노력이 한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식물도 살아있는 생명체다. 꽃잎을 위협하면 향기로 방어하고 가지를 자르면 눈물을 흘린다. 아픔을 호소하는 꽃들의 아우성에 눈을 감고 살았다. 만약 그들이 말을 하거나 움직일 수 있었다면 내게 뭐라고 소리쳤을까. 나는 여태 침묵 속에서 전하는 영혼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무법자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뒷정리하는 것도 싫었다. 내 손끝에서 멍이 들어 시들어버린 꽃들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이 불편했다.

꽃들이 다 그렇겠지만 침봉이나 오아시스(플로랄폼)에 꽂아둔 꽃들은 원래의 자리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턱없이 수명이 짧다. 그러고 보니 잠시 꽃을 보자고 비틀고 자르고 찔렀던 가위에서 손을 뗀 지도 오래되었다. 

시들어가는 시클라멘에 눈길이 간다. 사랑을 외면당한 선녀가 지상으로 던져버린 날개옷에서 피어난 전설의 꽃이 아닌가. 사랑을 준답시고 물만 주는 새 주인이 답답했는지 서둘러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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