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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이라고 할 것도 없는 동전 몇 개가 생기면 아이는 달려갔다. 그곳은 사방이 만화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뭉근하고 아늑한 공기가 흘러 태아처럼 몸을 놓일 수가 있었다. 아이는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사랑과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몽마르뜨 같은 이국의 거리를 거닐었다. 책방 유리문에 검붉은 무늬가 어리면 읽던 책을 꽂아두고 삐걱거리는 유리문을 밀며 그곳에서 나왔다. 어쩐지 쓸쓸해지면서 출렁이는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이 아이는 좋았다.

'앨피는 현관문을 조용히 열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재빨리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 천장에 달린 다락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기분 좋게 얼굴에 와 닿았다. 앨피는 다락문이 마치 잠수함에 달려 있는 비상구 같다고 생각했다' -앨피의 다락방-

어른이 되어, 왁자지껄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니라 혼자 심심하게 보낸 어떤 시간이 오롯이 떠오를 때가 있다. 배치 바이어스의 '앨피의 다락방'을 읽으며 나는 어린 시절의 만화방과 해질녘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눈앞에 다가서며 마구 그리워졌다.
앨피는 자기만은 다르길 바랐다. 라디오 장기경연대회에서 거의 우승할 뻔했던 할아버지, 주립대학 미식축구 장학생으로 갈 뻔했던 부버 형, 보석 가게에 취직할 뻔했던 엄마. 앨피는 거의 할 뻔하고 싶지는 않았다.
할 뻔하다가 못한 각자의 인생 문제에 갇혀 가족들은 앨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앨피는 만화를 그려서 다락방 천장에 빼곡히 붙여 놓고, 그곳이 천재 만화가가 유년시절을 보낸 창작의 산실이 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앨피의 공간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아파트에서 쫓겨난 부버형에게 앨피의 다락방을 내 준다는 것이다. 앨피는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으로 들어가 빗장을 내리고 문을 잠가버린다.
늙은 코끼리 같은 할아버지가 사다리 세 번째 칸까지 올라와 앨피에게 나오라고 하고, 엄마가 소방관을 부르겠다고 하고, 친구 트리가 농구 경기에서 여자 아이에게 졌다고 고민을 털어놓아도 앨피는 다락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동문학가 임순옥
아동문학가 임순옥

'나이를 많이 먹어 어릴 적 얼굴이 하나도 남지 않은 때가 되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힘에 겨워 후들거리면서 다락문을 들어올리고, 온몸을 떨면서 천천히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것이다. 빛바랜 거실에 내려와서 엄마, 앨머, 할아버지 모두 여러 해 전에 이사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앨피는 다락방을 지켜냈을까? 가족들은 앨피가 닫아버린 방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빗장을 내린 다락방에서 내려갈 길을 잃어버린 아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작은 몸 안에 우주가 있음을 보여준 아이, 앨피가 마음에 들어온다. 어린 나의 우주를 돌아보게 만든다. 
 아동문학가 임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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