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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

일본 에도시대에 상업경제가 발전하자 다양한 문화가 활발하게 일어난다. 지금이야 포장해서 문화라 부르지만 아마 당시 에도사람들은 신나고 아름다운 여가활동이었을 것이다. 그들만 아니라, 인간은 유희적 동물이라고 누군가 정의했듯 놀기 좋아하는 족속임은 틀림없다. 대략 18세기 조선에서도 이런 비슷한 활동이 있었다. 그중 한 가지는 그림으로 집안을 장식하거나 선물로 주고받는 것이었다. 이런 그림을 요즘은 민화(民畵)라 부르지만 속화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민화'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하는데, 일반 백성이 그렸다 혹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이렇게 규정했다는데 내심 얕잡아보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19세기에 이규경이 이보다 먼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풍속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으로 '속화'라고 규명했다. 두말할 것 없이 이규경이 지은 이름이 더 정확하고 명확하다. 물론 떠돌이 화가들이 먹고살기 위해 몇 푼에 백성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준 것으로 얕잡아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판다는 의미로 본다면 요즘 말로 '프리랜서'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니까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그만한 문화적 소양이 갖춘 사람들이 즐겼던 미술문화의 하나였던 것이다.

속화가 성행하게 된 동기나 현상이 자세히 기록된 것은 없지만, 이 시기에 양반이나 중인 사이에서는 서화 수집과 감상 취미가 성행했었다. 상대적으로 이에 대한 기록은 아주 많다. 그래서 속화는 양반의 서화 문화 활동과 유사한 백성의 활동으로 파악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다. 속화는 형식 혹은 소재와 내용에 따라 이름이 붙었다. 왕 집무실 뒤편에 자리했던 '일월오봉도'를 비롯해서 책과 진귀한 물품을 책꽂이 그림으로 그린 '책걸이도',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장생도', 꽃과 동물을 그린 '화훼·영모도', 곤충·물고기를 그린 '초충·어해도' 등 이외에도 많다.

화훼도, 종이에 채색, 54×65㎝, 19세기(?).
화훼도, 종이에 채색, 54×65㎝, 19세기(?).

이런 것을 보면 속화는 관청이나 집의 내부를 장식하는 그림 또는 그림으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표현한 기복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흔히 동양화(이 명칭도 정확하게는 적절하지 않다)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게 일반백성의 미적취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나 '금잔디'를 읽어보면 우리의 미적 취향에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세상 모든 색이 칙칙한 늦겨울 혹은 초봄에 처음 산에 피는 꽃분홍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막 솟아난 잔디의 초록이 얼마나 싱그럽게 다가오는지를 알고 있기에 김소월의 시를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감성을 알고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었던 것이다. 

여기 속화 한 점이 있다. 비록 꽃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마치 꽃잎처럼 생긴 잎사귀 위에 앙증맞게 작은 꽃이 피었다. 잎사귀 사이로 사방에 가늘고 기다란 노랑 기둥에 끝이 빨간 꽃 봉우리가 자리하고 있다. 빨간 봉우리 양쪽 끝에는 나비수염인지 어린 나팔꽃 넝쿨인 듯인지 모르겠다. 화면 전체에 꽃을 그려 넣고 하나의 줄기로 서로 연결해놓았다. 동글동글 말린 넝쿨이 화면에 운동감을 부여하면서 잎사귀의 하늘색과 붉은 꽃이 보색으로 대비되어 화면을 생동감 있게 바꿔놓고 있다. 비록 필치는 능숙하지 않지만 색의 사용이나 화면을 운영한 방법이 정성스럽다. 여염집 아낙이 밤마다 붓을 놀려 그린 것이 아닐까, 아니면 곧 시집가는 새색시의 부탁으로 아름다운 꽃그림을 그려서 판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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