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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덥다. 불가마, 가마솥, 찜통, 한증막. 더위를 표현하는 온갖 수식어가 무색할 지경이다. 그저 뜨겁다. 너무 덥다 보니 비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폭염과 한파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선택해 보라고 한다. 추우면 옷을 껴입으면 되지만 더우면 땀 때문에 불쾌하고 찝찝하다고 한파 편을 드는 사람, 더우면 불쾌하긴 하지만 생존은 할 수 있는데 한파엔 생존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폭염이 그나마 낫다는 의견. 나는 추위보단 더위를 잘 참는 편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이런 더위엔 슬그머니 한파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지구온난화·원전·난민·질병 등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가
지금의 우리를 더 두렵게 한다

 


무더위를 잊는 방법으로 여러 비책이 있겠지만 공포영화나 무서운 이야기가 제격인 것 같다. 실제 우리 몸은 공포를 느끼면 피부의 혈관이 수축되어 혈액순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피부의 온도가 내려가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고 하니, 공포영화나 괴담 피서법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 셈이다. 울창한 숲도, 뭔가 사연이 있는 저수지나 폐가도 근처에 없어서인지 어린 시절 공포스런 기억은 별로 없는 편이다. 그저 우리학교는 공동묘지 위에 지어져 소풍 갈 때마다 비가 내린다거나 현관 옆의 독서하는 아이들 동상에서 아이들이 책을 다 읽으면 학교가 무너진다더라 하는 흔한 학교 괴담류 정도. 그나마 생각나는 것으론 지랄이와 성황당에 관한 추억이다.

지랄이는 마을의 냇둑에 있던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혼자 살던 총각이다. 아이들이 지나가면 쫓아온다고 해서 그곳을 지날 때면 발소리를 낮추어야 했다. 지랄이가 쫓아와서 아슬아슬하게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학교에서 일종의 영웅담처럼 회자되었다. 

나도 지랄이에게 쫓긴 적이 있다. 아니, 이걸 쫓겼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판잣집을 혼자 지날 일이 있어 최대한 발소리를 낮추어 가만가만 지나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지랄이가 나왔다. 시커먼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검정 물을 들인 다 헤진 광목 옷. 눈이 마주치자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도망치다가도 궁금증이 일어 뒤를 돌아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랄이가 냇둑의 한복판에 넘어져 몸을 뒤틀고 있는 것이다. 눈을 홉뜨고 입에선 거품이 흘렀다. 그건 지랄이가 쫓아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광경이어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멈칫멈칫 바라보다가 그대로 냅다 도망을 쳤다. 

그 총각이 간질이란 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지랄이도 떠나고 판잣집도 헐린 뒤다. 우리를 잡으러 온다는 것도 지랄이의 병과 외모가 빚어낸 상상이고 무지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인 셈이다.

그리고 성황당. 우리 마을의 성황당은 마을 입구에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비탈에 있었다. 커다란 소나무 둘레에 돌무더기가 쌓여있고 새끼줄을 둘러 하얀 헝겊조각을 매단 곳이다. 성황당 바로 뒤에 우리 밭이 있어서 새참을 내가느라 자주 지나다녔다. 

그런데 낮에는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한 곳이 밤이면 정말 무서워졌다. 어느 날인가 성황당 밭에 두고 온 함지박을 찾으러 언니랑 늦은 시간에 간 적이 있다. 낮에 태연히 지나다니던 성황당이 언니가 있어도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바람에 날리는 하얀 천도 무섭고, 웅웅거리는 소나무 울음소리도 무섭고, 돌무더기가 마치 사람이 웅크린 것처럼 보여 더 무서웠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공포심은 대상을 잘 알지 못할 때, 그러니까 전혀 모르기보다는 어렴풋이 알 때 극대화 되는 것 같다. 그러니 과학적 이치나 원리를 잘 알지 못하던 옛날엔 도처에 신이한 요물들로 넘쳐났을 것이다. 도깨비, 구미호, 걸귀, 창귀 등. 하지만 요즘이라고 덜한 것도 아니다.

옛이야기에 나오거나 어린 시절 느꼈던 외부적이고 감각적인 공포 대신 보다 근원적이고 내면적인 공포라고나 할까. 요즘 폭염의 원인이라고 하는 지구 온난화, 원전, 안전하지 못한 먹거리, 환경 문제 등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가난, 식량난, 난민 문제, 새로운 질병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이유 없이 불특정 다수에게 가해지는 범죄 행위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무엇보다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뚜렷한 해결책이나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 그 알지 못하는 막막함이 두렵고, 불신이 가져오는 의심과 미혹이 두렵다. 아니, 설령 내가 안다고 해도, 안다고 여겼던 것이 사실 착각과 착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요즘 귀신은 친근한 텔레비전 화면이나 폰 안에서 나온다.

이 글을 쓰는 사이 나는 큰 공포를 경험했다. 글을 거의 다 쓰고 저장을 하지 않고 화면을 꺼버린 것, 아니, 안했다고 착각한 것. 삼복더위에 정말 오싹한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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