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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늘 빠듯한 도시인들에게 공원은 그야말로 숨구멍이다. 학성공원과 진해탑산은 여러 모로 닮았다. 애들 어릴 때 즐겨 찾았고, 두 곳 모두 벚꽃이 무척 탐스럽다. 도심 한 가운데 있고, 규모 또한 아담하다. 그럼에도 거대한 역사의 격랑 속에서 학성(울산왜성)은 왜구와 진해탑산(제황산공원)은 일제와의 피비린 과거를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

여전한 왜와 일제의 잔재
없애거나 벴다고 사라지지 않아
그 만행을 잊지않는 것이
또 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


학성공원은, 그간 연구해온 '봄편지'의 시인 서덕출의 땅이다. 힘겨웠던 일제 강점기에 불구의 몸으로 '대한 봄'을 애타게 그리워한 시인 서덕출의 시비가 학산동 그의 타계처가 보이는 서편 기슭에 있기 때문이다. 또 부근 벚나무 그늘 의자에서 단잠을 청하곤 하던 생전 필자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진해탑산은, 4월에 돌아가신 장인 기제사 갈 때면 언제나 돌던 해군사관학교 앞 남원로터리, 그 안쪽 김구 선생의 친필시비, 그 시비와 일직선으로 서 있다. 정 반대편으로는 이순신 장군 전승신화의 첫 승리 옥포 해전의 옥포 바다가 저 멀리 푸르게 펼쳐지고, 해군 군무원이셨고, 생전 욕심이라곤 없이 매사에 단아했던 장인어른이 일곱 딸들을 애지중지 길러낸 숭인동 적산가옥 처가가 떠오른다. 또한 대한의 독립이 필생 소원이었던, 그래서 1946년 진해를 방문했을 때, 일제가 한반도 침탈 최초로 계획 설계한 군항 진해의 해안경비대 장병들에게 충무공의 한시 '진중음(陳中吟)'에서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艸木知)-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 구나" 두 구절을 뽑아 써준 김구 선생의 극일에의 결기와, 왜구 침탈에 풍전등화 위국 앞에서, 목숨 초개같이 던져 지켜낸 이순신장군의 그 숭고한 넋 지금도 살아있는 곳이 진해탑산이다.

추운 겨울 지나 봄이 오면 만물이 너 나 없이 연두색 휘파람으로 소생의 기쁨에 분주하다. 그 와중에 폭죽 쏘아 올리듯 꽃망울 일시에 터뜨리는 벚꽃이 단연 압권이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이 벚꽃은 제주도 신례리, 전남 대둔산 등에 자생군락지가 있는 왕벚나무의 꽃을 이른다. 지난 2010년 산림청이 발표한 조사를 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나무가 바로 벚나무(27%)이고, 그 다음이 개나리, 진달래였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도 벚꽃을 천화(天火) 즉 신명의 불이라 예찬했고, 예전엔 봄바람에 꽃잎 날리는 모습이 선녀가 날개옷 벗는 것 같다고 벗나무라 했다. 아직도 북한은 벗나무라 이르니, 우리 조상들도 무척 사랑했음을 알겠다.  

그런데 이 꽃을 '사쿠라'라고 칭하며 우리보다 더 좋아한 일인은 아예 국화로 받든다. 그래서 그들은 목포나 부산 등지에 '사쿠라마치'라는 지명을 남겼다. 이문구의 장편 『장한몽』에 보면, "인부 하나하나를 이쪽으로 돌아서게 하고, 다시 사쿠라로 염색해 이용"한다는 구절이 보인다. 물론 이는 문맥상 누군가와 야합하는 사기꾼 혹은 야바위꾼을 의미한다. 몇 년 전, 순천에서는 저간의 역사적 침탈을 잊고 이 꽃을 즐기는 건 몰역사적이라며 백 살에 가깝던,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심은 신성포 왜성 벚나무 상당수를 하룻밤에 베어 버린 일이 있었다.

그간 일인 자손들이 벚나무 즉 사쿠라를 이 땅에 심으며, 그들 간악한 제국주의 식민정책과 침략을 미화하고 공고함을 꾀하려 했다면, 이 땅이 왜 어떻게 해서 일인의 손에 떨어져 유린되었고, 얼마나 오욕을 겪었으며, 앞으로는 그 같은 치욕 이겨내고, 어떻게 극일할 것인가에 머리 맞대고 진력해야 마땅하지, 말 못하는 무죄한 벚나무 수백 그루를 눈앞에서 단순히 베어 없애는 폭력과 야만은, 그거야말로 몰역사적이고 1차원적 감정소비에 불과한 행위다.

오히려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되살펴, 그간 저들 일인들이 사쿠라를 200여 종이나 육종하고 사랑했지만, 칼로 일어선 사무라이 정신을 상징하는 일본 국화 사쿠라의 원산지가 일본열도 어디에도 그 증거가 없고, 오히려 그 조상격인 왕벚나무는 우리나라 제주가 원산지이며, 해마다 되풀이되는 독도에 대한 저들의 후안무치, 수많은 증거에도 눈감고 억지스럽고 끈질긴 영유권 주장과 태도로 미루어, 엄중한 역사의식의 일본의 전 국민적 결여를 재확인하고, 화제가 못되면 무엇이나 순식간에 둔감해지는 우리의 의식, 늘상 외로운 독도에 대한 무관심에 경계의 날카로운 시선을 놓치지 않는 지혜의 타산지석을 삼아야 할 것이다.

엄밀히 울산 학성공원 즉 왜장 가토가 설계하고 왜구 손으로 축조된 울산왜성은 우리 문화유산이 아니다. 그러나 외적 방어용으로 쌓은 병영성과 읍성을 허물어 성벽을 만들었으니 무조건 아니라고만 할 수도 없다. 한편 진해 제황산에 탑이 세워진 때는 1927년이다. 외양은 일제가 러일전쟁 승전을 기념하여, 격파한 발틱함대 전함의 마스터를 본 떴다. 1967년 그 탑을 헐고 우리 군함을 상징하는 9층탑으로 다시 세운 것이 지금의 진해탑산 즉 제황산공원 진해탑이다. 제황산은 원래 부엉산이었다. 지리도참설에 부엉산 북쪽에 제황이 탄생할 명지가 있다 하여 제황산으로 고쳐 불렸는데, 일제는 그 서기를 러일전 승전의 힘으로 짓뭉개버렸다.

저 탑산 박물관 뜰 구석 배롱나무 앞엔 "朝鮮石 明治 四十三年 八月 二十九日"이란 글귀 의 망주석(望柱石)이 하나 있다. 학자들은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경술국치(庚戌國恥) 일을 기념한 기념물로 사용한 걸로 추정한다. 너무 섬뜩하다. 망자의 망주석이 망국석(亡國石)이 됐으니. 그래 기억해야 한다. 베어 없앤다고 사쿠라가 벚꽃 되지 않는다. 정신대 소녀상, 군함도, 731만행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기억해야 한다. 얼마 후면 경술국치다. 또 당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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