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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나니 입안이 얼얼하다. 치과에서 마취주사를 맞은 느낌이다. 왜 이럴까? 곰곰 생각해 보니 어제 옥수수로드에서 산 옥수수 한 묶음을 한 번에 다 먹어서 그런가 보다. 조금만 먹을 걸 하고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7월에서 8월 웅촌에서 삼동, 언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달리면 길가에서 옥수수를 파는 곳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솥에서 막 꺼낸 미끈한 옥수수를 만나는 반가움이 가득한 그 길을 나는 옥수수로드라고 부른다.

음식은 추억이라고 했던가. '옥수수' 세 글자에 얽힌 내 추억을 거슬러보자. 내가 태어난 고향은 백토(白土-고령토)로 유명했다. 마을 사람들이 농한기엔 고개 넘어 '백토구디[구덩이]' 작업장에 가서 일하러 나서곤 했다. 여름이면 그 백토구디 곳곳에 대규모로 식재된 옥수수밭 규모가 아주 컸다. 마을 옥수수밭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어린 내게 그 옥수수밭은 만주 땅만큼 광활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2005년 여름 노래가사에 나오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처음가 봤다. 심양에서 요양으로, 다시 고구려 백암산성으로 가는 길은 달리고 달려도 옥수수밭이었다. 이게 대륙이구나 싶었다. 아마 올 여름에도 우리가 만주라고 부르는 동북3성 지역을 여행하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지 않을까 싶다. 그때 고구려 첫 도읍지였던 환인에서 맛본 조선족 아주머니표 옥수수 맛은 잊을 수 없다.

'탈북여성 국내 박사 1호' 이애란 교수가 쓴 '북한식객'이란 책에 옥수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에서 강냉이(옥수수)는 북한 주민들의 애환이 깃든 음식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북한에서는 배급제로 인해 전국의 식단을 옥수수밥으로 단일화해 한민족의 음식문화를 말살해 버렸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지역의 전통음식 이름조차 모르고 있단다. 우리에게 익숙한 함흥냉면은 정작 함흥에서는 볼 수가 없고, 개성에서도 개성왕만두를 만날 수가 없단다. 통일은 밥상에서부터라는 말이 여기서 시작하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쌀이 남아돌고 그 쌀을 보관하는 비용만 해도 엄청나다는데 정작 북한 주민들은 그 쌀밥을 먹어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니 인도적인 차원에서 꾸준한 쌀지원은 필요하지 않을까. 한때 대북지원용 쌀로 분주했던 울산항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편 함흥냉면, 개성왕만두가 남한에서 당당한 브랜드가 되었듯이 향후 북한주민의 애환이 깃든 강냉이밥, 강냉이죽, 강냉이국수가 다이어트용으로, 별미로 재조명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
옥수수광인 나로서는 참 아쉽다. 중국 만주 땅에서 자란 옥수수는 현지에서 먹어 보았지만 훨씬 가까운 북한 옥수수는 여태 먹어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분명 그곳도 지금쯤이면 한창 수확기일 텐데 말이다. 울산은 북한 기아해결을 위해 옥수수를 보급한 김순권 박사가 태어난 고향이다. 그렇다면 울산에서 출발하여 북한 땅을 거쳐 만주까지 차를 달리며 지역 곳곳의 옥수수맛을 품평할 수 있는 동북아 평화의 옥수수로드를 구상해 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내 생애 그런 날이 온다면 누구보다 먼저 그 옥수수로드를 개척해 보고 싶다.

8월 15일 광복절이 다가온다. 8월 20일부터 금강산에서 제21차 이산가족상봉이 진행된다. 광복이 분단으로, 전쟁으로, 휴전으로, 이산으로…. 진정한 광복의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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