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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전 일이다. 같은 대학을 선생과 학생으로 다녔던 조카가 결혼과 동시에 맞벌이로 살 때다. 집안 대식구가 거실에서 삼삼오오 쉬고 있었다. 다과상 주위로 제각각 TV시청, 카드놀이, 대소사 의논, 잡담 등을 하는데, 필자는 소파에 그냥 앉아 있었다. 조카내외가 눈앞에 앉아, 처음엔 가만가만 얘기만 하더니 차츰 서로 손을 잡고 만지고 하다 어느 순간 신랑 뒤에서 껴안고 누르고 장난이 심하기에 하긴 신혼이니까 하고 넘어갔다. 헌데 화장실을 갔다 오는데 이젠 신랑 얼굴 여기저기 슬쩍슬쩍 뽀뽀까지 하는 등 스킨십이 지나친 게 아닌가?

제 아무리 신세대라지만 부모 형제와 친지 어른들까지 있는 자린데, 더구나 필자는 저의 선생 격이 아닌가? 헌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어느 새 나도 이 시대 트렌드조차 못 읽는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나? 아니면 한창나이에 힘겨운 주말부부라 잠시나마 공적인 그 자리의 의미를 망각해버렸나? 아무튼 마음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마구 얽힐 무렵 조카사위가 먼저 일어나면서 민망했던 상황이 자연스레 종료되었었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선생님, 사랑하면 정말 이뻐지나요?" 묻기에 "왜요, 자네도 사랑하고 싶나요?"하고 되받는데 종이 울려 수업을 마치고 나왔다. 

그때 필자의 뇌리에는 예의 조카내외와 까까머리 사춘기 시절 목청껏 따라 부르던 유행가가 떠올라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다시금 곰곰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때 떠올렸던 노래 가사는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 피네"란 구절이었는데, 수업시간 그 여학생도 최근 이를 리메이크한 걸 들었거나 그런 말을 들었나 보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사랑에 빠지면 매사에 긍정적이고 여유로운 심리가 자리 잡게 되어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지고, 내면은 자신감과 자부심이 높아지며, 사소한 일도 새롭게 느낀단다.

또한 예뻐 보인다는 말도 일리가 있단다. 우연히 들렀던 블로그에 "사랑은 묘약?"이란 제목의 연합뉴스 보도내용이 있어 그 기사를 떠올리며 아래 글을 잇는다. 사랑으로 인한 황홀한 감정은 뇌의 특정 부위를 활성화시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라는 성호르몬을 분비시키는데, 이는 원활한 혈액순환을 촉진해 윤택하고 탄력 있는 피부를 갖게 하므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방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서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되뇌어 본다


"눈에 콩깍지가 씐다."는 것 역시 빈말이 아니란다. 사랑을 하면 기분과 흥분을 고조시키는 물질인 토파민, 아드레날린, 옥시토신 등이 많이 분비돼 주위를 귀 기울이는 범위가 급격히 제한되는데, 그래서 미래보다 눈앞의 현재에 집중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 이외에는 끌리지 않고, 결점 또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단다. 특히 신체 접촉을 통한 흥분이 생기면 본능적 욕구의 억제력이 떨어져 유치하고 낯 뜨거운 행동도 서슴지 않으므로 한두 번은 눈감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 신혼시절 조카부부의 많이 민망했던 그 모습도 이제 이해가 간다.

그런데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것들이 진정한 사랑일까? 진실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린 왕자》의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통해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내에 대한 절절함을 노래한 시집《접시꽃 당신》의 도종환은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가는 것"이라 했다. 그는 무엇을 기다렸던 것일까? 암이 전신을 파고드는 병마로 사랑을 잃고 쓴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의 한 조각이다. 따라서 그녀가 비워두고 간 그 꽃자리를 처음엔 자잘한 일상에 스며있던 그녀의 체온에 대한 기억으로, 그러다 점점 짙어지는 그리움이 봇물처럼 터지면 그땐 저 시에서처럼 스스로를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우면서, 더 큰 사랑으로 채우며 살아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안도현 또한 시 <사랑한다는 것>을 통해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하게 되면,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 들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는 삶을 살게 된다고 노래한다. 이처럼 '더 큰 사랑'과 '서로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하는 의지'는 확실히 눈에는 안 보이는 사랑이란 점에서 보다 진정한 사랑에 가까워 보인다.

최근 몇몇 가까운 시인들로 구성된 모임에서 생텍쥐페리의 잠언집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함께 읽고 토론한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토론내용은 사랑한다는 것과 매우 유사한 걸로 관심을 갖는 것과 관계를 맺는 것 둘로 모아졌다. 특히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기다림이 시작되고 동시에 아쉬움과 그리움이 싹트고, 그것이 점차 쌓이고 깊어지면 서로가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 그의 주위로까지 관심과 애정이 확산되어 세상이 온통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로 빼곡해진다.

그렇게 '더 큰 사랑' 속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지면 저도 모르게 혼신의 힘을 다해 지켜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선 정리됐었는데, 그래서 저 잠언집의 표제가 "사랑을 한다는 건 책임을 안다는 것"인 이유라고. 

사랑하기 좋은 가을이다. 그러나 무책임한 사랑이 곳곳에서 판을 치는 오늘을 살면서 필자는 더욱 힘주어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사랑한다는 것은 진실로 그 사랑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사랑은 책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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