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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초등학교 앞에 섰다. 운동장이 손 한 뼘에 다 들어온다. 손으로 만든 앵글 안에서 이리저리 각도를 바꿨다. 어떤 방향이어도 작은 것에서 비켜서지 못했다. 그토록 크게만 느꼈던 운동장에 속은 것 같아 야속하기만 했다.

앞산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보고 오던 길이다. 길목인데도 매번 지나치기만 할 뿐 쉽게 들어서질 못했다. 어떤 일이든 때가 있나 보다. 이번에는 가볍게 마음이 동했다. 손님처럼 조심조심 교문을 들어섰다. 

어린 날을 보냈던 학교는 이미 폐교가 된 지 오래다. 수련장으로 쓰이는 방갈로가 휑한 운동장을 메웠다. 넓었던 운동장을 잃어버린 터라 서늘한 바람이 한바탕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포구나무 아래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관중석과 도랑물에 대걸레를 씻으려 오르내렸던 계단이 이끼를 머금고 있었다. 나의 비옥한 유년도 축적된 이끼 속에서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나고부터 어머니의 먼 동생네 작은 방에 세를 들어 살았다. 그 주인집에는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은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애가 학교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나는 울며불며 엄마를 졸라 학교에 갔다. 어머니는 입학통지서가 나온 것이 아닌데도 떼를 쓰는 나를 데리고 학교로 갔다.

혹시 내가 입학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입학을 거부당하자 심술이 난 나는 우물에 자갈을 던지기도 하고 흙을 손으로 퍼 담아 던졌다. 보다 못한 선생님 한 분이 빵을 가져오시며 일단락되었다.

빵의 역할이 더 컸지 싶다. 나를 겨우 달랜 엄마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나는 학교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주인집 아들과 여러 차례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고 했다. 아직도 선하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나는 학교에 가게 되었다.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신나게 뛰어갔다.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때의 그 길에 서 있다.

아름다운 유년 시절 기억 안고
초등학교 운동장 거닐어보니
발걸음마다 일렁이는 그리움이 
가슴 속에 지문으로 남는다



내게 학교는 왜 그리 크고 웅장하게 느껴졌었는지 모르겠다. 선배들이 다 떠나고 학생 수도 줄어들었다. 우리가 시골 학교의 마지막 한 무리가 되었고 학교는 더 스산스러워져 갔다. 그래도 내게는 무척 크게 느껴졌다. 운동회가 되면 그 넓은 운동장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찼던 때가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어울리는 마을 잔치나 다름없었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까만 운동복을 입고 서로 편을 갈라서는 온 힘을 위해 뛰었던 곳, 한 번도 달리기로 상장을 받아보지 못한 운동장이다. 그랬으면 어쩌랴 기억되는 하나하나가 아직도 곰삭지 못하고 어제처럼 생생할 뿐이다.

혼자 빈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한 걸음에 통과했다. 뛰어도 멀게 느껴지던 운동장, 놀다가도 수업 시작 종소리가 들리면 들숨 날숨으로 달리고 했다. 그 끝에 우물이 그대로 있었다. 쓰지는 않아도 옛 모습이 조금 남아있었다. 덮어 두었다. 무거운 뚜껑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였다. 모래와 자갈을 던지던 어린 날의 그 시간도 있었다. 우물 바로 옆에는 내가 늘 청소를 담당했던 교장 선생님 사택이 있었다. 건물은 그대로인데 녹슨 문은 겨우 잠겨 있을 뿐 반쯤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느 봄날부터였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사택에서 청소하는 것이 내게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사택 마당에는 딸기가 군데군데 빨갛게 열려있었다. 하루 만에 다 익지도 않고 제철이 끝나는 늦은 봄날까지 나는 혼자 딸기를 따 먹을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딸기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몰래 훔쳐 먹듯 하나씩 먹었고, 그러던 어느 날부터는 내 것처럼 따 먹었다. 언젠가 딸기 먹는 내 모습을 교장 선생님이 보고 웃으며 단맛이 있냐고 물었다. 그다지 단맛은 많지 않아도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골 벽촌에서 어떻게 신맛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자상하던 교장 선생님도 아주 오래전에 부고장만 남기고 먼 길 가셨다. 텅 빈 학교는 고만고만했던 조무래기들의 꿈들을 품고 있었다. 하나하나 불러 보고픈 이름들이 그때의 모습으로 그곳에 있는 듯했다. 음악실이 따로 없어서 음악 시간만 되면 덩치 큰 남자아이들이 교무실에서 풍금을 무겁게 나르던 모습도 환영처럼 내 곁을 스쳐갔다. 달리기를 못했던 나에게 운동장이 유달리 더 크게 느껴졌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무심히 옆을 스치듯 지나며 연필 칼로 까만 고무줄을 끊고 도망 별난 개구쟁이들도 있었다. 그네를 타거나 구슬치기를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혼자 외롭게 빛 바라기만 하던 외롭던 친구도 그곳이 있었다.

나는 그토록 가고 싶던 초등 육 년을 다니고는 그 마을을 완전히 떠났다. 이사를 한 것이다. 지나온 그 어떤 기억보다 그때의 아름다운 흔적들이 깊인 각인 되어 있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 늘 가슴 한쪽이 저릿저릿하다.         

오래된 정자나무는 품어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없는데 무색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언젠가 또 한 번은 다시 오고 싶은 그때의 기억들을 두고 돌아섰다. 부지런히 걸었던 곳이다. 수 없이 다녔던 내 어린 날의 발자국에 한 발 한 발 덧대어 포개본다. 발걸음마다 일렁이는 그리움들이 눈앞에서 지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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