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트를 매일 가기로 한다. 꼼꼼히 날짜를 보고 성분을 따지고 채소코너에 가서는 신선도를 살피며 되도록 제철음식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탑돌이 하듯 천천히 마치 의식을 치르듯…
내가 공지영 작가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를 읽고 나서 생긴 버릇이다. 먹는다는 행위가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가 인생을 얼마나 풍성하고 품위 있게 즐길 수 있게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식들이 성장하고 이제 겨우 한 끼나 두 끼 저도 집에서 먹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영양가 따져가며 집 밥을 먹이려고 애를 썼다. 고기보다 채소를 더 한 번 먹이려고 아이디어도 짜보고 염분과 당분을 줄이고 담백한 입맛을 가지게 하려고 고군분투 하였다.
맛? 맛은 글쎄다. 영양을 생각하고 염분을 염려한 음식들이 맛까지 있었으면 아이들과 굳이 그렇게 다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식으로부터 혹은 인스턴트 음식들로부터 아이의 건강을 지켜내려는 의지에 힘을 다해서 맛까지 고민할 여력이 사실 없었다. 그런 장금이의 손맛은 요리사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토록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 줄게'하면 한 숨을 쉬었었나?
'소울푸드'라는 말이 있다. 삶의 허기를 채우는 음식을 뜻한다. 음식의 맛보다 음식에 담긴 스토리가 주재료가 되는 음식. 나는 이제 와서 잠시 후회한다. 아이들에게 차라리 영혼에 좋은 음식을 해 줄 것을 그랬구나! 몸에 좋은 음식도 물론 성장기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겠지만 어쩌면 아이들의 마음을 키워주는 일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요리법에 내가 감탄하는 까닭은 그녀는 맛과 영양을 적절히 잘도 살려 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하는 엄마로서 자녀도 나보다 많은데 말이다.

'소망이 우수수 떨어지는 날도 있어-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날엔 시금치 샐러드'
'남자는 변하지 않으며, 변할 생각이 없다- 우선 김치비빔국수를 먹자'
'죽거나 미치지 않고 어떻게 힘든 시간을 이길까- 가래떡을 먹으며 '홈뒹굴링'하는 날…'

책을 처음 펼치며 읽어내려 간 목차만 보아도 나는 그냥 위로를 받았다.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심플한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요리도 삶도…
그러나 그녀가 권하는 간단한 레시피의 음식들 속에 담긴 스토리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실연을 당하고, 사회에서 가부당하고 친구에게 배신당한 아픈 이들의 힘든 과정을 그녀 역시 다 겪어냈고 아파했고 아직도 치유 중이었다. 그 숙성(?)된 삶의 지혜가 이제 새롭게 아파하는 딸에게 '소스'처럼 곁들어져 맛을 음미하게 한다. 구하기 쉬운 재료들처럼 삶 속에 고통과 번뇌는 항상 널려 있으니 '자, 우리의 몫은 그것을 더욱 즐기는 일이야'라는 듯…
그냥 단순히 요리책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나는 이 책을 사랑할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아주 무심하게 치부했던 '요리'라는 행위의 숭고함을 깨닫게 했으니까 말이다.
한 번쯤 먹어 보았던 시금치국이나 해장국 그리고 떡구이 같은 일상의 음식들이 어쩜 그렇게 멋진 음식 매뉴얼로 탄생을 하는 것일까? 나는 또 나를 위로하고 키워준 그 음식들에게 온당치 못한 취급을 하며 살았구나 하는 반성도 생겨났다.
어떤 요리사의 요리비법이 음식에 대하여 혹은 먹는 행위에 대하여 이렇게 원초적 감사를 끌어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삶은 공평하지 않다. 삶은 평화롭기만 하지도 않아.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나면 삶은 신기하게도 우리에게 그 너머의 신비를 보여준단다'

작가는 이제 막 독립하는 딸에게 세상을 이렇게 소개한다. 우리는 어쩌면 잘못된 모성애를 모델삼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잘했다"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다"며 응원하기 바빴다. 좀 더 확실하게 느끼도록 힘주어서 말하려고 애를 써왔는데 공지영 작가는 아주 냉정하게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그러니까 냉철하게 받아들여라한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종아리가 따끔했다. 엄마에게 투정하다가 회초리 맞은 아이처럼... 오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나는 혹시 한 쪽 눈을 감고 세상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왜 그 이야기가 너무나 냉혹하게만 들릴까? 사랑하는 자녀에게 차마 말해 주지 못할까?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인데 말이다. 내가 사회에 툭 던져졌을 때 아무도 나를 공격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상처를 받았었다. 이유 없이 매번 삶에게 속는 것 같아 분개했다.
나는 그녀의 글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나는 공평하지 않은 것이 바로 삶이란 걸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전환하려고 애를 썼고, 다시 그 벽에 부딪쳐서 다시 울고 이를 악물고... 그리하여 그녀처럼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발견되는 너머의 신비를 나는 알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서 '딸에게 주는 레시피'가 '나에게 주는 레시피'로 바뀌었다.
그녀도 딸에게 줄 레시피를 적어 내려가며 아마도 젊은 날 그녀 자신에게 위로의 말들을 전한 것은 아닐까? 나도 이제야 내 자신에게 조용히 위로의 말을 전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의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야. 그냥 세상은 원래 공평하지 않아"
그러고 나서 나도 나의 딸과 그 음식들을 해먹어 볼까한다.
먹으면서 내 딸에게 그녀처럼 이야기 해 주려한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그래도 괜찮아. 그 속에서도 사랑도 존재하고 아름다움도 존재하니까 살만하다'고 귀띔해 줘야지.

'언제나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게 힘들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게 힘들고 잘사는 것만큼 잘 죽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비워야 잘 내려오고, 잘 죽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우리의 누추한 삶은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단다'

누추한 삶일지라도 행복할 수 있다. 늘 비어있고 항상 내 위에 나를 지지대처럼 밟고 있는 사람이 존재해도 우리는 충분히 잘 죽을 수 있다. 가난해도 나눌 수 있고 가진 것 없어도 웃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우린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삶의 종착역이 비록 죽음이라도 흔쾌히 우리는 가볍게 떠날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으로 채우려 했던 지난날들이 오히려 나의 존재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더 높은 곳을 지향하다가 더 센 구둣발에 짓이겨진 적도 많다. 이렇게 누군가와 끊임없이 경쟁하다가 초라한 죽음을 맞이할 것 같아 문득 두려워진다.
공지영 작가가 이곳 울산에서 이 책을 가지고 강연을 했을 때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말에 자기의 자존심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뜻 비슷한 말 같지만, 자기 자신은 자기의 자존감보다 더 우월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차이를 알 수 있기를…"
나는 비로소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다. 20대와 30대에는 그것의 차이를 몰랐다.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존심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낸 것도 같다. 그러나 정작 그것으로 힘들어 하는 내 자신은 모르는 척 했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을 때 상처 때문이 아니라 허우적거리는 내 자신이 버거워 힘들었다. 부디 20대를 눈앞에 둔 우리 딸에게는 자존감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줬으면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단순히 '딸에게 주는 음식 레시피'가 아니라 불공평한 세상을 살아가는 내 자신에게 위로의 음식을 손수 만들어 주며 위로하는 비법을 배웠다. 멀지 않은 시간에 나의 딸도 나의 품을 떠나 세상에 홀로 설 것이다. 나는 딸에게 과연 어떤 음식으로 세상과 맞선 딸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그녀처럼 여러 가지 음식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두가지 나만의 소울 푸드를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위해 먼저 나는 나에게 소중한 음식을 만들어 주기로 한다. 정성껏 장을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요리를 해서 나의 영혼을 채우리라. 그 후에 너무도 소중한 또 다른 나인 내 딸에게 그 요리를 사랑의 이야기들과 함께 전수해 줄 것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