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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어느 한쪽이 득이면 다른 쪽이 손해되는 걸 종종 본다. 소위 대응관계(大應關係)가 되는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예는,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1970년 미국인 최초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의 행복 공식이다.

그의 공식은 경제학자답게 지극히 자본주의적이다. 즉 행복=소비(소유)/욕망이 그것이다. 이를 풀어보면, 욕망하는 크기만큼 소비(소유)해 주면, 즉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만큼, 사고 싶은 자가용이나 고급 주택, 좋은 옷 등을 사고 싶은 만큼 소비(소유)해 주면 최고로 행복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나 욕구는 사실 그 속성상 무한대에 가깝다. 따라서 웬만큼 소비하거나 소유해서는 끝이 없다. 불가능하다. 이를 추종하거나 따라가면 행복은 끝끝내 만날 수 없는 신기루가 되고 만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현인들은 이 욕망의 값에 주목했던 것이고, 이런 대응관계를 일각에서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라 부르기도 한다. 저 헤아릴 수 없이 허다한 각종 선발 대회,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에 "더 많이"가 추가된 각종의 다양한 스포츠 그리고 풍선효과도 그렇고, 수많은 이해관계의 맨얼굴이 또한 그러하다.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이면 모두 예외가 없다. 

이를 새삼스레 곰곰 되새기게 된 것은 울산 중구의 한 도서관 독서감상문 대회 대상도서를 챙기다가 그들 속에서 젊은 작가 임현의 단편 '그들의 이해관계'와 무심코 마주친 결과다. 필자는 제목에서 "이해관계"를 얼핏 두 가지쯤으로 떠올렸다. 하나는 철저한 이해타산(利害打算)이란 차가움 즉 예의 대응관계였으며, 다른 하나는 진실한 내면을 서로 받아들이고 안아주는 포용이었다.  

작품 속 주인공은 아내와 몇 번을 일상 속에서 부딪치다가 급기야 몹시 다툰 며칠 뒤, 그의 아내가 혼자 좀 쉬고 오겠다고 하자 다음날 일찍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해 준다. 한데 예약하지 않은 발걸음이라 배차시간이 어중간하자 주인공은 급하게 남는 차편을 구해 아내를 태워 보냈고, 그 결과는 느닷없는 아내의 교통 사고사였다. 비통하고 뼈저린 후회였다. 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극 앞에서 헤매고 허우적거리던 주인공은 어느 순간 아내의 그 죽음이 누군가에겐 복권당첨 같은 뜻밖의 행운이 된 다행임을 목도한다. 

바로 이 부분이 작가가 드러내고 싶은 장면으로 보였고, 필자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고 읽게 했다. 그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는데 그로 인해 누군가는 살아남는 기적을 경험했다면, "사고를 피한 게 기적이라면 그러지 못한 쪽은 무엇인가, 기적의 반대말이 뭐야?" 주인공의 이 고통스런 독백은 왜 하필 당하는 쪽이 내 아내인가로 이어진다. 그런데 다행인 쪽에서 보면 그럼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죽어도 되는 사람인가로 되받아칠 것이다. 여기서 사고를 당한 쪽과 기적적으로 그 덕분에 살아남은 쪽이 각자의 처지를 대응관계로 고집하면 정말 불행한 이기주의로 흘러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의 주인공은 아내 덕분에 사고를 피하고 다행히 살아남은 버스 기사에게, '어떻게 당신은 사고를 피하고 살아남았나?'라고 절규하듯 묻고 싶었지만, 그를 만나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돌아서 가다가 가까운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를 사서 그에게 건네주고 만다.

그것은 그 버스 기사가 주인공에게 그 사고에 대해 자기는 전혀 몰랐다고, 그리고 그 순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그걸 내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나는 다 미안해지더란 말입니다."라고 울먹이며 가슴 아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아내 대신 행운을 얼결에 거머쥔 그 버스 기사의 등을 두드려주며,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다독여주었다." 여전히 죽은 아내가 간절하게 보고 싶고, "그립고 아픈 것들은 조금도 줄지 않았으나 그때는 그런 것들이 몹시 필요해 보였다."고 주인공은 생각하면서 그로부터 돌아선다. 그의 다행을 아프지만 이해한 것이다.

바로 소설의 이 후반부 때문에 필자는 오래 생각에 잠겼었다. 앞의 폴 새뮤얼슨의 공식처럼 대응관계로 저들이 만났다면 고함이나 삿대질과 저주만 난무했을 것이다. 하긴 현실의 다수는 폴 새뮤얼슨의 공식에 맞게 경제적 만족에서 여전히 행복을 찾고 있지만. 그렇게 되면 저 두 사람의 상황은 앞서의 예에서 보듯 영원히 나아지지 않았을 게다. 그런데 다행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그 상황을 너무 미안해 울먹이며 가슴 아파했고,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여전히 고통스러운 주인공은 오히려 살아남아 행운의 주인공이 된 그를 위로하는 것이 그때는 몹시 필요함을 몸으로 느끼고 행한다. 이른바 포용으로 대응관계를 깨뜨려버린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나의 불행은 너의 행복"과 같은 대응관계 즉 제로섬 게임은 남는 게 최대로 쳐도 '0'(zero)에 불과하다. 그리고 하나만 고집하고 나머지를 거부하는 부정처럼 일대일은 하나뿐, 막히면 끝이다. 그러나 우리네 천차만별 삶의 본질은 관계에 있고, 그 관계는 하나로는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경우를 긍정으로 이해·포용하는 다행(多幸)으로 보면 거기엔 배려와 무한의 가능성, 내일이란 아름다운 삶이 있다. "불행 중 다행이고 그나마 다행"의 다행(多幸)은 행운이나 행복이 겹쳐 있다. 아무리 크고 험한 일을 당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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