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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고추가 필요한데 한 바구니는 너무 많다. 담아 둔 소쿠리의 반 만 달라고 조심스레 물어본다. 할머니는 귀만 열어 둔 채 쳐다보지도 않고 마수란다. 나는 얼른 옆에 있던 쪽파 한 단을 더 사기로 한다. 할머니의 마수걸이에 훼방꾼 됨을 피하는 방법이다.

학창시절, 등교하는 길에 어머니의 장 보따리를 들어 드리거나 머리에 인 짐을 내려드리느라 장터까지 따라 들어가곤 했다. 장터에 도착한 어머니가 적당한 자리를 골라 짐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해운대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올라온 장꾼들이 어머니의 함지박을 뺏다시피 내렸다. 어머니가 이고 가신 채소를 통째로 사려는 장사꾼과 좋은 값을 받으려는 어머니가 서로 마수걸이 다툼을 했다. 

물건을 팔 사람과 살 사람들의 흥정으로 시장바닥은 시끌벅적했다. 여기저기서 침을 뱉는 소리도 유별나게 들렸다. 물건을 팔고 받은 돈에다 침을 퉤퉤 뱉었다. 침 뱉은 돈을 머리에 쓱쓱 문질러 고쟁이 속 빨간 주머니에 넣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수걸이 의식은 그렇듯 생경스러웠다. 

나의 마수걸이는 어느 시점이었을까, 결혼 후, 숨 막힐 것 같은 좁은 집을 벗어나 문화센터 강의실에 자리했을 때였다. 강의 중에 강사가 느닷없는 질문을 했었다. 사랑이 먼저냐 돈이 먼저냐고. 유형의 것이라곤 없던 삼십 대 초반의 나는 무형의 사랑을 선택했다. 그러자 강사는 가난이 대문 열고 들어오면 사랑은 지붕 뚫고 달아난다고 했다. 

내가 가진 작은 희망의 싹마저 매정하게 잘라버린 강사를 섭섭해 할 새도 없었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현실을 바로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하니 행복할 수 없었고 매사 남의 탓을 하고는 했다. 아이들의 먹거리나 장난감, 책, 옷 등을 못 사주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는 것도 남편을 과녁 삼아 날마다 화살을 쏘아댔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쉴 틈 없이 일만 하던 남편이었다. 월급날이면 백 원 한 푼 뗄 줄 모르고 봉투째 가져다주는 성실한 남편을 탓하는 내가 한심스러워 자책을 반복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른들 말씀을 빌려, '살다 보면 온다'는 '때'가 그때였을까. 체념한 듯 살고 있을 때, 남편의 직장주택조합에서 아파트를 분양한다 했다. 아파트 입주는 언감생심이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신청해 놓고도 희망자가 많아 탈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매사에 자신감이 상실돼 있던 때였다. 

그래도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추첨일이 되어 집을 나서던 그 날도 누굴 향해서인지 불쑥거리며 솟아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렀다. 누구에게든 탓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도리어 남편을 추어올리는 칭찬까지 하며 추첨 장소로 향했다. 그러고도 채기처럼 쌓인 뭔지 모를 불만을 어루만지며 긍정의 생각만으로 몰아붙였다. 내 인생의 마수걸이가 될지도 모를 일에 스스로 방해꾼이 되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과는 아파트 당첨은 물론, 흔히 말하는 로열층을 추첨했다. 오랜 기간 곁방살이에서 벗어나 아파트라는 높은 곳에서 훤하게 트인 조망을 안고 살 기대에 젖었던 그때를 잊을 수 없다. 그 후 집을 옮길 때마다 모든 것이 무난히 이루어졌다. 행복이 대문 열고 들어오니 불행은 지붕을 뚫고 달아난 격이다. 

마수걸이는 개시를 의미한다.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을 거라는 기대심리를 내비치는 희망의 메시지다. 요즘은 재래시장보다는 텔레비전에서 더러 접하게 되는 낱말이다. 경기 내내 득점 없이 나가다 시원한 한 방의 점수를 땄을 때 마수 홈런이니 마수 골이니 하며 스포츠 경기에서 듣게 된다. 마수 점수를 얻고 다시 그 기점으로 새로운 기치를 올린다는 기대를 한다. 시대의 변천에도 마수걸이에 거는 바람은 여전한 모양이다. 

살면서 누군가의 마수걸이에 방해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여 재래시장 할머니 표 푸성귀로 가득 찬 파란 봉지가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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