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혼사 사시는 어머니가 부엌에서 넘어져 오른팔이 골절됐다. 병원에 가서 어렵게 어렵게 수술하고 두 달 넘게 입원했지만 별 차도가 없어 퇴원을 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잘 넘어진다. 일단 노인들은 넘어지면 쉽게 골절이 된다. 이때부터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보호자가 보살피든가, 아니면 요양원에 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100세 시대 우리의 자화상이다.

지금도 어머니는 여전히 오른손 사용이 불편하나 그럭저럭 혼자서 버티고 계신다. 다행히도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과는 차로 30분이 채 안돼 언제든지 갈 수 있다. 물론 집 바로 앞에는 외삼촌이 살고 있어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주고 있어 나에겐 큰 다행이다. 그러나 언제 급히 찾는 전화가 올지 몰라 늘 비상대기를 한다. 그것은 꼭 군에서 5분 비상대기 훈련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는 꼭 들리려 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프고 난 뒤 추위를 많이 타고, 입맛이 예전만 못해 점점 여위어 간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난방기 점검과 먹거리를 챙겨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틈틈이 언양 장날에 구경을 간다. 걷기도 하고 혹시 먹고 싶은 것이 있는 지, 또 사고 싶은 것이 있는 지를 챙겨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무엇이 먹고 싶은지 은근히 물어 본다.

"장에 왔는데 아무 것도 안 먹고 그냥 가면 안 되니까 뭐 좀 먹고 가자."
"집에 가서 있는 밥 먹으면 되지, 그냥 집에 가자."
"아이고 참, 장에 왔다가 아무것도 안 먹고 가면 자식들이 못 산다는 말도 안 들어 봤남."
"그 말, 다 옛날 말이다. 먹고 살기 어려울 때 며느리가 만든  말이다."
"그러니까 먹고 가자고요. 뭐 먹을까. 국밥, 곰탕, 짜장면."
"그럼, 짜장면이나 먹고 가자."

국밥이나 먹고 가자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짜장면을 먹자고 했다. 어머니도 나처럼 짜장면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있는 것일까. 내가 짜장면을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었다. 읍내에 짜장면 집이 있어 아버지가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짜장면은 새로운 음식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짜장면을 처음 먹고는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을 얼마나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게 짜장면은 나와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지금도 짜장면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짜장면을 먹어 본 사람은 반드시 찾는 음식이다. 군에서 휴가를 나가면 꼭 먹고 싶은 음식 부동의 1위인 짜장면, 2006년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100가지 문화상징'에 선정됐으며, 중국에서 왔지만 우리가 즐기는 대표 외식메뉴다. 2005년 인천 차이나타운에서는 '짜장면 100주년 기념 축제'가 열렸으며, 2012년 4월에는 인천 공화춘 자리에 짜장면 박물관이 문을 열어 인천까지 짜장면을 먹으러 갔는데 짜장면 종류가 많아 골라 먹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몇 년 전 잠시 중국에 살 때 중국 짜장면은 어쩐지 살펴보았다. 우리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의 국수처럼 국물이 있는 것만 달랐다. 이런 짜장면은 화교(華僑)들이 이국땅에서 살 수 있게 해 준 음식이었다.

짜장면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몇 가지를 살펴보면, 그 음식점의 수준을 판가름 하는 대표음식, 재료가 복잡하지 않아 대량으로 만들기 쉬운 음식, 가장 빨리 먹을 수 있고, 쉽게 질리지도 않으며, 먹는 법도 간단한 음식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그중 하나는 '공중전화로 주문하고 자리에 돌아오면 벌써 배달 와 있다'는 것. 이렇게 짜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꽤 길다.

그날, 포크로 짜장면을 먹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 짜장면에 대한 추억을 하나 더 만들게 됐다. 짜장면을 맛있게 드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 먼 길을 떠났을 때 아들이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앞으로 아름다운 시간을 많이 만들어요'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