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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자주 내리지 않는 곳에 살다보니 눈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이 그리워진다. 오늘도 추적추적 겨울비가 오는데, 안동 사는 지인이 거기엔 눈이 온다며 붉은 남천 잎 위에 내린 눈 사진을 보내왔다. 눈 내린 들판처럼 삽시간에 눈에 관한 생각이 가득 찬다. 지금 눈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눈의 나라에 있다면. 예컨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처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눈의 나라에는 고등학교 때 읽은 박용래 시인의 '저녁 눈'이란 시가 있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시인의 시선은 외따로 떨어져있는 주막집과 근처의 빈터로 향한다. 아직 쌓이진 않고 분분히 흩날리며 내리는 눈발. 길손이 말을 타고 왔는지 마구간에 조랑말이 들었다. 오랜 길을 달려와서 조랑말도 사람처럼 시장하다. 주인은 군말 없이 여물을 썬다. 눈발이 날린다. 늦은 저녁의 여물 써는 소리처럼 붐비며 내리는 눈의 조용한 소란스러움.

이 시를 생각하면 옛집의 부엌이 떠오른다. 그을음 때문에 검게 변한 나무문 사이로 큰언니가 아궁이에 솔가지를 밀어 넣는 게 보인다. 저녁밥을 짓는 게다. 솔가지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다 가끔씩 송진이 뭉친 부분에선 화르륵 불길이 커진다. 가마솥 뚜껑 사이로 밥물이 끓어 넘친다. 벽에는 둥근 채반과 무시래기 두어 줄이 걸려있고, 구석의 시렁에는 하얀 사기그릇이 포개져 있다. 그 아래는 바가지가 띄워져 있는 커다란 물 항아리. 시렁 맞은 편 구석엔 솔가지와 갈잎과 삭정이가 높다랗게 쌓여있다. 그런 부엌으로 붐비며 내리던 눈이 바람을 맞은 듯 갑자기 들이칠 때가 있다. 아궁이불을 앞에 두고도 한기를 느꼈는지 언니가 몸을 일으켜 부엌문을 닫는다. 지금도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눈 내리는 저녁의 풍경. 

그리고 밤새 눈이 내려 창호가 환해진 아침도 있다. 까치가 우는 걸 보니 손님이 오시려나. 서설이다. 쌓인 눈은 흔적을 남긴다. 예닐곱 살 때의 어느 아침, 마당에 난 발자국을 보니 아버지는 나무하러 가고, 오빠와 언니들은 학교 가고, 엄마는 집안 일로 바쁘고, 나만 혼자 한가해서 눈 위에 발자국을 빙 돌려가며 찍어서 꽃 모양을 만들다가, 아버지 발자국을 따라 큼직하게 발을 떼보다가, 그것마저 시들해져 뒤뜰로 가본다. 장독대와 굴뚝과 감나무와 들장미와 꽃밭의 시든 풀들 위에 눈이 쌓여 있다. 그리고 미처 거두지 못한 무, 배추, 파들이 눈에 묻혀 있다. 고요한 아침이다. 

희디흰 눈위에 누워버리는 것
그 곁에 햇살마저 드러눕는 것
오늘은 어느 먼 곳에 눈 내리고
가까운, 아주 가까운 곳에 쌓이고


김장 항아리와 무 구덩이 근처의 엄마 발자국 말고도 눈 위를 종종거리며 뛰어간 작은 새, 성큼성큼 걸어간 좀 큰 새. 무 밭에 어지러이 찍힌 쥐 발자국.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마른 감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 눈 위를 비추는 눈부신 햇살. 고요하다. 햇살이 점점 퍼지다 점심나절 쯤 되면 지붕 위의 눈이 녹아 기왓골을 따라 똑, 똑 떨어지고, 고드름이 툭 떨어져 땅에 부딪치며 와사삭 부서지고, 굴뚝 근처엔 참새가 내려앉아 소란을 떨다 한꺼번에 날아가고, 그리고 다시 고요하다. 굴뚝 근처 벽에 등을 대고 햇살이 점점 따스해져 가는 걸 느끼며 해바라기 하던 시간. 그 시간의 고요.

나도 박용래 시인 풍으로 시를 한 편 써 본다. "쌓인 눈을 보면 안다 //이건 장광을 다녀온 엄마 발자국 /이건 삭정이를 지러 산에 간 아버지 발자국 /(나는 아버지 지게에 붉은 명과 열매가 걸려 있길 바라며) /이건 양말을 두 켤레씩 껴 신고 학교 길에 나선 언니, 오빠들 /모양만 진돗개인 우리집 재동이가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고 //뒤란에는 무 뿌리를 파헤친 쥐 /찔레나무 밑을 금방 다녀간 것은 꿩인지 멧비둘기인지 /그리고 마지막 남은 감잎이 툭 떨어져 /희디 흰 눈 위에 누워 버리는 것 /그 곁에 햇살마저 드러눕는 것 //오늘은 어느 먼 곳에 눈이 내리고 /가까운, 아주 가까운 곳에 쌓이고"

시마무라는 기차를 타고 눈의 고장으로 미끄러져 갔다. 하지만 나는 기차를 탈 수 없다. 그러니 시간을 미끄러져 간다. 시간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눈의 나라가 있다. 겨울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옛집의 사립문 앞에 걸음을 멈췄다. 살그머니 눈 쌓인 사립문을 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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