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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산 끝에 걸쳐있다. 포근한 햇살 몇 번만 품고 나면 한 해의 무거웠던 시간들도 꽃잎처럼 사라지리라.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것들과 하루하루를 우연인 듯 조우하다 보면 따듯한 사람들과 일들이 편안한 옷처럼 다가올 것이라 여긴다.

지인들과의 약속 시간을 길게 남겨 두고 집을 나섰다. 초행길은 아니지만 오래전의 토막난 짧은 기억을 더듬다 보면, 어느 한 모퉁이에서 거짓말 같이 생각의 길이 툭 끊기고 만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번잡한 삶의 후유증이라고 위로하면 좀 나은 듯하다. 서툴고 모르는 먼 길은 발품을 좀 더 팔면 된다. 평소에 시간 약속은 칼처럼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조급함에 일을 그르치기보다 조금만 서두르면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남의 시간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내면 보시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를 배려하려다가 오히려 덤으로 여유를 얻는 셈이다.

길을 찾기에 마음이 조급하지 않아서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 맥없이 피해줘서 눈살 찌푸리지 않게 하는 것도 좋다. 시간 여유는 여러 면에서 이로운 것이 많다. 무엇보다 넉넉한 시간에 주변의 것을 보면서 마음이 평화로워짐이다. 태화강을 거슬러 오를수록 마음이 더디게 움직인다. 태화강의 줄기인 샛강을 끼고 있는 다운동을 지나 물시불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낯설지 않다. 도로 옆 가장자리의 자투리 공간에 차를 세웠다. 지나는 바람과 낮게 하늘을 날고 있는 것들과 시간을 공유했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는데도 알싸한 것이 시원하게 다가와 매섭지 않다. 참으로 오랜만의 여유로움이다. 도심을 조금 벗어났는데도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물시불은 이름만으로도 마음 가득히 풍요로워지다가 때론 시리기도 한다. 잠깐씩 멈춘 생각에는 가늠되지 않는 시공간을 초월한 그것들을 유추하는 것이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럼에도 막연하게 그곳에 가면 걸쭉한 사내들의 입담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라진 옛길에는 등짐 진 보부상이 겨울인데도 봉놋방에서 걸치고 온 때 묻은 무명으로 연신 땀을 훔치며 고갯길을 오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척에 두고도 물어물어 어렵게 물시불 주막을 찾아냈다. 그나마 일찍 나섰던 덕으로 일행들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키 큰 주인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실내로 들어서자 화목 난로가 주막의 겨울을 덥히고 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등을 데우며 눈은 물시불 촌장의 손길을 따른다. 나는 그를 촌장이라 부르고 싶다. 시인의 투박하나 정겨운 말들이 아름다운 시가 되어 주막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벽을 타는 시들은 절망이다가 때론 희망이다가 그 어느 보부상의 기억이기도 하다. 그것만이겠는가. 이곳으로 찾아든 촌장의 갈증이 시가 되기까지, 조우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가 가끔은 만물의 사랑이기도 하다가 슬픔이기도 할 것이다.

시가 되지 못한 화두는 때로는 은혜가 되어 지나는 벗들에게 길도 내어 주리라. 우리가 살고 있지 않았던, 그 어느 날의 언어들은 술잔에 수없이 많은 별처럼 내려앉았다가 떠났을 것 같다. 벽이 된 몇몇 시화의 행간에는 은자가 된 시어들이 수정된 암호처럼 오래된 소리들을 하나하나 깨우고 있다. 민낯인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숨겨둔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듯하다. 한 편의 시들은 하나의 이름이 되어 우리가 알던 것들과 더러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비밀의 빗장을 열고 있었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저렇게 가감 없이 마음을 비우고 맨 얼굴의 글을 쓸 수 있을까? 그 잠깐의 시간동안 반쯤은 용기가 생기고 또 반은 두려움이 깃드는 순간 주인장이 화덕의 불꽃을 올렸다. 내가 잠깐 불러내었던 사실이었을 법한 것과 선택적 거짓들이 불꽃을 따라 별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 오랜 그때와 지금이라는 시간 사이에서 흔들리는 아득함을 아는 듯이, 말없이 화덕을 만지는 시인의 마음이 난로 위의 불꽃처럼 주막 바닥에 흘러내렸다.

창으로 들었던 볕도 돌아갈 집이 있는 모양이다. 아쉬움이 달작 지근한 탁주처럼 감겨온다. 남은 시간들은 예인들의 구심점이 되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풍성한 시들이 늘어가고 개다리소반 대신 탁자가 모서리를 메우고 막걸리 한 사발에 냉이 전으로도 충분하다. 패랭이를 쓰고 드난살이 같은 삶이라도 물시불 주막의 막사발로 허기를 채우고 투전판에 곡절 많은 하루하루 생을 걸었으리라. 마당에는 왈짜패들의 왁자지껄함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지 않다.

조금씩 멀어지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물시불 주막을 나섰다. 한적한 마당을 가로질러 걸음을 옮긴다. 다시 조금은 더딘 걸음으로 내게도 여유를 주고 싶다. 버거운 것들은 내려놓고 물시불에 드나들었던,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살아도 행복했던 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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