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등대여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살펴보던 나는, 여권 속에 든 등대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단순한 호기심은 곧 소망이 되었다. 생의 가을 녘에 서 있는 나는,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등대 순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2019년 본보가 새롭게 선보이는 '이지원의 등대기행'은 수필가 이지원 씨가 지난 2017년 11월부터 1년 여간 진행한 등대여권 스탬프 투어를 통해 전국의 등대를 기행하며 기록한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가까운 울산의 등대를 비롯해 동해안, 서해안 등 전국 곳곳의 등대에서 보고 느낀 생생한 등대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팔미도등대를 찾아가는 길이다. 초봄의 따사로운 볕살과 훈풍이 살랑대는 인천연안부두, 제비가 날아올 것 같은 날이다. 정오를 살짝 넘긴 바다는 은빛 구슬을 쏟아 부은 듯 눈부시다. 

연안부두 광장에 낯익은 인형이 보인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다. 이 인형이 왜 여기 있을까 싶었는데 이곳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이라고 한다니 인천과 자매결연이라도 맺은 모양이다. 여느 여행객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 열다섯곳의 등대 여정 첫번째 길
드디어 유람선에 오른다. 배가 보름 만에 출항한다고 하니 전날 왔더라면 헛걸음이 될 뻔했다. 

복잡한 항구를 빠져 나오자 유난히 긴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가 보인다. 이어 서해대교가 보일 때쯤, 유람선 주변으로 갈매기들의 군무가 펼쳐진다. 날갯짓이 쾌활하다. 그 모습을 보며 오전 시간을 통째 허비한 아쉬움을 털어낸다. 

첫 배를 타려고 서둘러 왔는데 최소 인원에 못 미처 오전엔 출항을 하지 않는다고 것이다. 오후 배를 타려면 네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시간을 아끼려고 첫 배를 타러 왔다가 속절없이 시간을 축내게 되었다. 작정하고 계획했던 일이 시작부터 꼬이자 그 다음 일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판단을 유보하다 배표를 미리 알아보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선상에 서 있지만 인천에서 배를 타니 어쩔 수 없이 '세월호'를 떠올리게 된다. 한동안 배를 타는 것이, 바다를 보는 것이 무척 두려웠었다. 우리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고 커다란 상처를 남겼지만 서로에게 그 상처가 덧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인천항에서 제주로 가는 뱃길은 아직 열리지 못하고 있다. 
 

유람선에는 커다란 황금물고기 한 마리가 우뚝 앉아 있다. 마치 이 배의 수호신 같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출항 전 몇 가지 주의사항과 여행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이어진다. 팔미도는 인천항에서 뱃길로 오십 여분 거리에 있으며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지만 군사보호지역으로 해군이 주둔하고 있다. 

항구를 빠져나온 배는 남쪽을 향해 나아간다. 황금물고기 유람선이 뜨면 갈매기들이 몰려든다더니 배 위로 하늘 반 갈매기 반이다. 셔터를 마구 눌러도 작품 사진 한 장쯤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갈매기들은 이 배가 나타나면 먹이가 있다는 것을 반복학습을 통해 알고 있었다. 

너울도 바람도 없는 잔잔한 뱃길이다. 시작이 순조롭지 못했으나 지금은 최상의 기분이다. 우리 삶에서 예기치 않는 일은 늘 있어왔고, 그럴 때마다 어떻게 마음을 먹는가에 따라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이 여행을 위해 내게 주어진 시간은 나흘, 두 군데 섬을 여유 있게 돌 수 있는 시간이지만 결국 하루 만에 다녀 올 수 있는 팔미도로 가고 있다. 바닷길은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깝다고 무리할 수는 없는 일, 세상의 변수는 때로 사람을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삶의 순리를 깨우치게도 하지 않던가. 

팔미도 등대 전경.
팔미도 등대 전경.

# 115년전 불을 밝힌 우리나라 첫 등대
팔미도가 점점 가까워진다. 난생 처음 찾아가는 섬, 그곳에 115년 전 처음으로 불을 밝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있다.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다. 

등대여권을 받고 등대를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은 2017년 겨울 무렵이었다. 우선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있는 울기등대를 비롯해 몇 군데 등대는 이미 다녀왔다. 

동해안에 있는 등대들은 내륙에 접해 있어 비교적 찾아가기가 쉽다. 한 겨울 혹한을 견디면서 날 풀리면 서해안을 돌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첫 번째로 찾은 곳이 서해 팔미도등대다. 나의 등대 순례는 이곳을 시작점으로 삼으려 한다. 

팔미도에 닿았다. 배에서 내리자 맞선이라도 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지의 땅에 첫발을 디뎠을 때처럼 긴장과 흥분이 교차한다. 섬의 이름은 하늘에서 내려다 봤을 때 여덟팔자八尾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 

1903년. 처음으로 불을 밝힌 팔미도등대는 백 년 동안의 소임을 끝내고 지금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안식에 들었다. 2003년에 신 등대가 지어졌기 때문이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국전쟁의 인천상륙작전 당시 상륙함대의 이정표 역할을 했으며, 서해를 오가는 수많은 뱃길을 밝혔던, 그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든 등대, 백 년을 오롯이 바닷길을 비춘 등대다. 고단한 서해의 풍파를 견뎌낸 등대다. 마음이 한결 같지 못해 늘 갈등하는 나는 그 앞에 서니 절로 숙연해진다. 

구 등대보다 높은 자리, 더 높이 솟아 있는 신 등대 안으로 들어간다. 아담한 공간 유리벽에 여러 지역의 등대 사진이 바다를 배경으로 전시돼있다. 바닥에는 우리나라 지도가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을 찾아본다. 떠나온 곳에서 꽤 멀리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난다. 

# 백년의 소임끝에 찾은 안식
3층에서 등대여권에 스탬프를 찍고 책이 꽂혀 있는 등대도서관에 가져간 졸저 '무종'을 꽂아두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올라간 전망대에서 서해를 본다. 사방으로 펼쳐진 바다는 지금,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동해나 남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곳은 부산보다 중국이 더 가깝고 북한이 가까워서인가, 묘한 긴장이 흐르는 것도 같다.

유람선을 함께 타고 온 사람들의 표정이 봄볕처럼 화사하다. 저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나처럼 희망의 씨앗 하나 품고 가려고 왔을까. 겨울을 털어내고 봄 마중 나온 것일까. 아무렴 어떠랴. 사람의 삶이 거창한 것 같아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즘의 나는 시시때때로 느낀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며 마음먹었을 때는 미루지 말 일이다. 

우리나라 아름다운 등대 열다섯 곳을 찾아 떠나는 여정, 나로서는 녹록지 않은 행보이다. 하지만 힘들기에 더 해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간절함은 때로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간절함으로 모험은 시작되었다.  

오래된 등대 앞에 다시 선다. 이 순례 길이 무탈할 수 있도록 간절함을 담아 마음을 모은다. 작은 섬 한 바퀴를 돌고 나자 그새 떠날 시간이 되었다. 파란 하늘 위로 갈매기 한 마리 희망의 깃발처럼 높이 날아오른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