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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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신문
  • 2019.01.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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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사전이 한 권 있었다. 앞뒤 표지가 떨어져나갔지만 아무튼 우리말을 모아놓은 국어사전이었다. 아버지는 풍년초란 가루담배를 사전에 말아 피우셨다. 사전 종이는 얇고 질겨서 담배를 마는 데 제격이다. 사전을 알맞게 찢어 담배가루를 올려놓은 다음 꼭꼭 말아 혀끝으로 붙여놓으면 궐련 한 개비가 되었다. 나는 언니, 오빠들 어깨너머로 배우고 아버지도 막내라고 손수 가르쳐주셔서 한글을 좀 일찍 뗀 편이다. 글자는 익혔는데 딱히 읽을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공짜로 배달되어 오는 서울신문과 농민신문, 그리고 예의 그 사전을 들추어보기 시작했다. 사전엔 재미있는 말들이 많아서 나중엔 아버지한테 담배종이로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내가 가지기로 했다. 그러니까 표지도 떨어지고 앞부분도 좀 찢어진 사전이 처음으로 내 것이라고 갖게 된 책인 셈이다.

사전에 실린 소크라테스 사진을 보고 감자같이 생겼다고 '얼평'을 하다가, 그래도 4대 성인 중 한 분이라니 대단한 사람인가보다 하고 감탄하던 기억. 어느 책에선가 '독감'이란 낱말을 보고 대체 독감이 뭔지 궁금해 하다(우리는 감기나 고뿔이란 말은 썼어도 독감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전을 찾아보던 일. 어디서 '가소롭다'라는 말을 배워가지고 말끝마다 사용하다가 언니가 사전을 찾아보고 혼을 내는 바람에 더 이상 쓰지 않던 일. 나중엔 큰 오빠가 졸업 상품으로 비닐 표지에 띠지까지 두른 사전을 받아오고, 인근에 만화방이 생기면서 만화에 정신이 팔려 등한시하게 되었지만, 낡은 사전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 내 지식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사전의 낱말은 또 다른 낱말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예컨대 '양심'이란 낱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라고 나온다. 그러면 '도덕적'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다시 사전을 찾아보게 된다. 이렇게 사전을 찾다보면 한 낱말에서 다른 낱말로 고구마 줄기처럼 뻗어가서 사용하는 낱말의 양이 늘어나게 된다. 더구나 우리 때는 국어 시간에 낱말 뜻을 찾아오라거나 비슷한 말/반대말, 본디말/준말, 높임말/예사말 등 여러 가지 낱말을 찾아오라는 숙제가 많아서 사전이 정말 필요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영어 사전이 필수라서 사전을 안 가져오면 몹시 야단을 맞았다. 그래서 졸업상품으로 흔히 사전이나 옥편을 받았는데, 그러다 보니 나중엔 집에 같은 사전이 여러 권 쌓이고 책장 한쪽이 모두 사전 차지가 되었다. 

아마 내가 구입한 가장 비싼 사전은 외판원에게 산 <새우리말큰사전>일 것이다. 당시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삼성출판사 전집류, 창비 영인본을 팔러 다니는 외판원이 많았다. 빈 강의실이나 벤치에 앉아 있으면 검정색 서류가방에 팸플릿을 든 외판원이 다가와, 이 책을 사야만 지식인의 범주에 드는 것처럼 달변으로 현혹 시키곤 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몇 달 할부로 장만한 사전인데 너무 크다보니 자주 봐지지도 않고, 나중엔 컴퓨터 물결이 부는 바람에 세월의 흔적만 더해졌을 뿐 새것이나 다름없이 책장 한쪽에 꽂혀있게 되었다. 

컴퓨터가 일상화 되면서 사전의 위상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다. 컴퓨터나 폰으로 낱말을 손쉽게 검색할 수 있어서 요즘은 집에 사전 없는 집도 많을 것이다. 사전 찾기를 학교에서 배우긴 하지만 예전처럼 강조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사전도 원고지와 비슷한 길을 걷는 것 같다. 글의 분량은 원고지 몇 매라고 하지만 막상 원고지가 아니라 A4 용지에 글자 크기는 몇 포인트, 글 간격은 얼마 하는 식으로 재해석 하는 것처럼, 사전도 손 안에서 검색이 가능하다보니 종이 사전은 이제 하나의 유물이나 골동품이 되어 가는 것이다.

책장의 큰사전도 청소할 때마다 무겁고 번거로워서, 대학에 입학하는 아들이 집을 떠나면 책장을 정리하는 김에 아예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말모이>란 영화를 보고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일제 말,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주시경 선생의 뒤를 이어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말모이'란 말을 모아 놓은 것, 그러니까 사전의 다른 이름이다.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회원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는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주시경 선생은 "언어의 존재에 국가의 존립이 달려있다"고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대거 검거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는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에 따라 회원들에게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되었다. 우리말과 글의 중요성과 파급력을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검거된 33명의 회원 가운데 두 분이 옥사를 하고, 실형을 받은 분들도 광복이 된 이후에나 석방되었다. 우리가 예사로 사용하는 낱말들이 이분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살아남고 지켜진 것이다.

사전은 말 그대로 낱말 하나하나를 모아서 만든 책이다. 그 많은 낱말 하나하나를 모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화에서도 사투리를 모으기 위해 지역 사람을 일일이 만나거나 편지를 수집 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많은 분들의 희생과 민중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온 것이니 그걸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집에 우리말 사전 한 권쯤은 있어야 되겠다. <새우리말큰사전>도 좀 더 눈에 띄는 곳에 두고 틈틈이 펼쳐봐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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