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의 원조고향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의 원조고향
  • 울산신문
  • 2019.03.05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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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포경산업의 뿌리를 찾다] (2) 방어진의 포경업
일본인들이 두고 간 어선 활용
백두선형제 등 고래잡이 시작
어족자원 풍부 지역경제 번영
전국 각지서 노동자 몰려들어

한석근 향토사학자

방어진의 첫 포경선은 청진호였다. 청진호는 목선인데 정어리잡이 배를 개조해 포경선을 만들었다. 원래 정어리잡이 배는 일본인이 운영하였으나 해방이 되면서 방어진에서 모든 일본인들이 알게 모르게 도망치듯 본국으로 돌아가자 외지(함경도, 청진, 강원도 장전 등)에서 조업하던 배들은 미처 방어진항으로 귀항하지 못했고, 그 배를 관리운영하던 배 가운데 한 척인 정어리잡이 목선을 1945년 포경선으로 만든 것이 청진호이다.

사실상 장생포는 러시아가 먼저 선점해 만든 포경거점 '울산구정포해경기지(蔚山九井浦海鯨基地)'가 있었기 때문에 일인들이 쉽게 한국의 연안 어업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그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장생포는 방어진보다 조금 앞서 한국인에 의한 포경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1945년 후기 방어진에서 백천건(白千健)은 청진호를 앞세워 동양포경㈜을 1948년에 울산 내에서는 세 번째의 포경회사를 설립했다. 

# 해방 후 시작 50년대 후반 최전성기
이보다 앞서 장생포에서는 일본에서 폐선으로 처분하려던 포경선 2척을 구입해 장생포로 돌아온(1946.4.16) 김옥창은 조선포경㈜을 설립하고 뒷날 이날을 기념해 '한국포경기념일'로 지정했다. 그 때 들려온 포경선이 '제7정해환' 이고, 뒤이어 온 것이 '제6정해환' 이다. 이것이 한국 독자적인 최초의 현대식 고래잡이선이었다. 조선포경㈜의 설립은 일본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포경㈜ 포경부에 근무했던 박덕이(朴德伊)를 사장으로 추대했고, 전무는 김옥창, 상무는 이경화, 이사는 서상이, 상무 겸 감사는 조동완이 맡고 서울시 중구 동자동 12번지에 본사를 두고, 부산출장소에는 일본 동경 수산강습소 본과 어소학과를 나온 전찬일이 소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46년 10월 6일 조선포경㈜ 은 포경선 2척을 추가로 구입했다. 이때 공동 구입한 대표주주가 박덕이, 김영주(金永珠), 노소출(盧小出)을 비롯한 80여 명이 동참했다. 청진수산㈜  취재역 사장 천본창일(川本彰一)로 부터 근착선 1척과 제3영동환(嶺東丸였다. 이것을 포경선으로 개조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미 방어진에서도 백두선 형제들이 포경선을 띄워 고래를 잡고 있었다. 다만 포경회사는 1948년에 들어서 해방 후 세 번째로 등장한 회사이다. 창설자는 그동안 울산지방의 수산계 원로인 백상건이었다. 백상건은 약관 20대의 청년 시절부터 맏형인 백두선의 밑에서 수산업을 익히며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들 4형제 중 위로 3형제는 처음 저인망선(고대구리)을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그의 경영지인 방어진수산㈜  전무 취재 역으로 취임했다. 그의 이력서에 의하면 1948년 11월 동양포경㈜ 취재역 사장으로 취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형인 백천건은 주로 내무를 맡았다. 이들 형제는 해방 전부터 저인망 어선과 정어리잡이 근착선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나가선(상어잡이)과 저인망선을 더욱 확대하여 본격적인 어업을 주도하였다. 이들 4남녀 형제들은 모두 수산업에 종사하였으며, 나중에 여동생인 백말숙은 해방 이후에는 방어진 초등학교 아랫편에서 평화사이다와 파인사이다 공장을 하며 독립했다. 

동양포경㈜ 을 설립하고 경영하면서도 백천건과 백상건 두 형제는 형제포경㈜을 확대 설립했다. 이들 백씨 형제들이 경영했던 포경선을 비롯한 저인망선, 나가선, 근착선(학꽁치와 삼마잡이) 등이 모두 17척이나 되어 방어진 항구에서는 이들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고 부산을 제외한 동해안에서 산재한 어항(포항, 구룡포, 강구, 죽변, 주문진, 속초 등) 가운데 가장 어획량이 많고 재무구조가 탄탄한 수산업의 선두주자였다. 
 

# 부산 제외 동해안 수산업 선두주자
당시 방어진항구는 자고 나면 물 반 고기 반으로 어족자원이 넘쳐났고, 포경산업도 전성기를 누렸다. 해방 전후에 생겨난 말이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 고 할 만큼 돈이 흔했다. 사실 이 말은 일인들이 살던 방어진에서 생겨난 말인데, 이즈음에 와서는 마치 장생포항구에서 생겨난 것 같이 와전되고 있다. 단지 장생포항구에서도 고래잡이로 전성기를 누릴 때는 앞서 한 말이 쓰일 만큼 경기가 좋고 포경선주들은 흥청망청 주머니가 두둑해서 씀씀이가 좋았고, 선장, 포수, 기관장, 갑판장 등의 고급 선원들도 청루골목을 누빌 만큼 호경기였었다.

이렇듯 돈이 넘쳐나던 방어진 항구에는 외지에서 고기잡이배를 타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울산의 병영과 방어진에는 집성촌이 없고 객지에서 찾아든 각성바지가 많다. 방 씨, 천 씨, 도 씨, 변 씨, 남 씨, 전 씨, 신 씨 등 숱하게 희성이 많았다. 한국 성 씨 분포상으로 가장 많다는 김 씨, 이 씨, 박 씨는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동양포경㈜ 는 방어진항의 동쪽 편인 동진 마을(목거랑)에 고래해부장을 만들어서 포획한 고래를 이곳에서 처리했다. 청용도 같은 한 발 반이나 되는 긴 칼을 든 해부사 두 세명이 좌우에 서고 가장 능숙한 해부사가 집채만 한 대형고래(긴수염고래류)의 잔등에 올라서서 토막 낼 부위를 눈대중으로 짐작하고 칼로 금을 긋는다. 검은 피부가 순식간에 갈라지고 눈덩이같이 하얀 지방층이 보이고 그 금 그은 것을 기준 잡아 양편의 칼잡이들이 능숙하게 해체를 시작한다. 흰 지방층 속에서 붉은 고래 살코기가 무너지듯 좌우로 갈라진다.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숨을 죽이고 신기한 듯 바라본다. 

1시간이 채 못 되어 그 큰 고래 사채가 거짓말같이 난도질당해 부위별로 나눠진다. 여기서 고래고기의 열두 가지 맛이 선별된다. 5장 6부를 비롯한 우내(속 뱃살), 정술(수염판 잇몸), 오베기(뱃가죽의 엷은 피질) 등 특별한 맛을 지니고 있다. 어쨋든 고래고기는 배고픈 시절의 중요 먹거리였다. 가장 값싸고 쉽게 구입하여 많은 식구가 배 굶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고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동양포경㈜가 설립할 당시는 포경선이 한 척이었으나 더욱 확대하여 두 척으로 늘렸으며, 최초의 청진호 포수는 황경춘(1995년도 사망)인데, 황포수는 기관장에서 포수까지 도맡은 외눈박이였다. 방어진 항구에서 이후 포경선은 기하급수로 늘어나서 청진호를 위시한 백경호, 대경호, 정흥호, 청구호, 삼화호, 대경호, 어생호 등 모두 8척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철선으로 백경호가 건조되었다. 어생호는 방어진수산중학교 실습선을 부탁받아 포경선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백상건은 청어잡이 목선을 개조해 만든 제3천진호 이외에 제1두산호는 70톤급으로 일본에서 수입해왔다. 1950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백천건의 큰아들 백만술이 포경업에 뛰어들었다. 이때가 최전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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