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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봄비가 잦다. 삼월의 촉촉이 내리는 비는 춘우(春雨)며, 화우(花雨)며, 조우(鳥雨)이다. 봄에 내리니 춘우요, 봄꽃을 재촉하니 최화우(催花雨)요, 온갖 새들에게 울기를 재촉하니 최조우(催鳥雨)인 셈이다. 

태화(太和)의 강에 황어가 돌아오게 하니 최어우(催魚雨)며, 계변(戒邊)의 하늘에 붉은부리갈매기 떠나기를 재촉하니 최송우(催送雨)이며, 만물을 잘 자라게 하며 만물과 공존을 알게 하는 태화우(太和雨)인 셈이다. 일찍이 홍만종(洪萬宗)은 <순오지(旬五志)>에서 '봄비가 잦으면 마을 집 지어미 손이 크다(春雨頻下 里母手鉅)'라고 하여 춘우삭래(春雨數來=봄비 잦은 것)를 부정적으로 봤다. 

하지만 우순풍조(雨順風調) 시화년풍(時和年豊)의 봄비는 봄을 맞이하는 모든 이의 바람이다. 춘분 지난 봄비는 생명 싹 틔우는 단비로 만물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생명수의 역할을 한다. 봄비가 아니면 강 두둑의 양지바른 곳 애쑥의 수줍은 미소를 어찌 볼 수 있겠는가?

봄비를 제일 반기는 새가 있다. 산자락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텃새이다. 이마에 찍는 곤지는 머리에다 찍었다. 옷은 검은색, 흰색, 빨간색, 적갈색, 녹색 등 화려한 때때옷을 곱게 차려입었다. 

왠종일 이산 저산, 이 골짝 저 골짝, 이 나무 저 나무, 죽은 나무 산나무 가리지도 않고 찾아 날아다닌다. 노련한 암벽타기 선수인 양 수직의 나무를 여유 있게 기어오르기도 한다. 때로는 청솔모와 마주하여 앞서고 뒤 쫓기도 한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아침, 가까운 산자락에서 '끽 끽 끽'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정경을 느끼기에 충분한 새이다. 특기는 생나무에 구멍 뚫기며, 죽은 나무 쪼기다. 사랑에 눈치 없는 서방을 원망하는 상대역의 새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바로 딱따구리이다. 울산에서 쇠딱따구리, 청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등 3종이 사계절 관찰되는 새이다. 딱따구리의 이름은 박박(剝剝), 탁탁(啄啄) 등 나무를 쪼는 소리에서 연유했다. 한자는 탁목조(啄木鳥)로 쓴다. 문인화, 한시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친숙한 새이다. 절집에서는 딱따구리를 흥미롭게도 목탁 새로 통한다. 이 새가 죽은 나무를 쪼아 먹이를 구할 때 나는 공명(共鳴) 소리가 마치 목탁(木鐸) 소리로 들린다하여 목탁새로 통한다. 특히 봄 산사에서 '똑 또그르∼ 똑 또그르∼' 청아한 소리가 들리면, 스님의 목탁 소리인지,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인지를 분간 못할 정도이다. 

딱따구리는 매년 생나무에 구멍을 파서 둥우리를 만들며, 죽은 나무를 쪼아 먹이를 구한다. 딱따구리는 약 2억 5,000만 년 전부터 나무를 두드리며 살아왔다고 한다. 딱따구리는 생태환경에 매우 적합하게 적응되어 있다. 강한 다리근육과 발가락으로 수직면에 오랫동안 달라붙을 수 있다. 뻣뻣한 중앙꼬리 깃털은 몸을 안전하게 잘 받쳐주기 때문이다. 특히 발가락 2개는 앞을 향하고 2개는 뒤를 향하는데 큰 발톱이 나무껍질을 꽉 붙잡는 대지형(對趾型)으로 나무타기 선수로 진화했다. 

딱따구리의 부리는 예리하고 몸집에 비해 길다. 생나무에 구멍을 내어 둥우리를 만들만큼 단단하다. 딱따구리의 예리하며 긴 부리는 민속에서 귀신의 눈을 쪼아 파는 부적으로 인식했다. 충치, 치질 등 깊숙이 박혀 고통 주는 사된것을 쪼아 쫓아버린다고 여겼다. 

문학적으로는 시어(詩語)에서 나무 쪼는 소리를 박박 탁탁(剝剝 啄啄)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그의 시 <탁목조(啄木鳥)〉에서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를 지나는 길손이 지게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표현하여 정감 표현이 극치에 달했다.

민요에 등장하는 남편은 딱따구리보다 못한 멍텅구리로 원망의 대상이다. 봄비가 촉촉이 숨죽여 내리는 야밤에 합환주 앞에 놓고 만단정회(萬端情懷)를 나누고자 하는 아낙의 춘흥(春興)을 몰라주는 멍텅구리이다. 민요 '정선아리랑'을 찾아 떠나본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 그리워 운다'로 시작되는 아낙의 사랑 결핍은 급기야 딱따구리를 빗대어 메나리조로 푸념을 한다. 
'앞산에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의 저 멍텅구리는 뚫어진 ○○도 못 뚫나'

다소 외설적이며 노골적이며 되바라진 표현이긴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는 가사이기도 하다. 낮에 고된 노동도 초저녁부터 갈등(葛藤=칡과 등나무)으로 감기고 싶은 다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옛날과 다르게 우리 집의 저 멍텅구리가 결코 눈치 없는 멍텅구리가 아닐 것이다. 환경호르몬, 오염물질, 사회적 스트레스, 육아비, 교육비 등 현대적 삶이 딱따구리를 멍텅구리로 만들지 않았을까? 딱따구리 울음소리를 들어도 옛날 같지 않은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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