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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ㆍ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올해만큼 일제강점기 하의 독립운동과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린 적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에 대한 관심이다.

어제 '제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의 마당 광장에서 국민참여형 축제로 열렸다. 여의도공원(옛 여의도비행장)은 74년 전인 1945년 8월 18일 한국광복군 이범석,김준엽, 노능서, 장준하 등 4명과 미국 OSS(전략첩보국) 요원 18명이 C-47 수송기를타고 착륙한 곳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두고 말이 많다. 이승만을 배제한 정부수립 기념식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갈등을 불러 오고 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다.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시작이 초라했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공식화 했다. 그해 9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 수립일을 9월11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1919)·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해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같은 초기 외교활동과 함께 무장 저항운동에도 앞장서 수많은 일제 저항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했다. 이 때문에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와해시도로 중국 전역을 유랑하듯 옮겨 다녔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자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국내 상황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됐다.
무엇보다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라고 해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는 역사성을 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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